[職四] 홍대리와의 데이트

직장인의 사계 - 봄 (팀원과 함께 제주도 출장길에서)

by 등대지기

데이트라는 말의 어감이 어색하긴 한데 이보다 더 이번 출장을 정확히 표현할 단어가 없어 굳이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홍대리는 저희 팀에 있는 남성 직원입니다. 혹여나 다른 오해가 있을까 미리 말씀드립니다. ^^




갑작스레 제주도로 1박 2일 출장을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업무 관련 회의가 제주에서 있다길래 옳다구나 팀원 면담도 하고 제주도의 맛도 느껴 보는 기회로 삼기로 맘먹고 바다 건너 해외(?)로 길을 나서 봅니다.


새벽 비행기인지라 집에서는 4시 좀 넘어 나섰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홍대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 봅니다. 사무실에서 업무로만 만날 때와 달리 회사를 떠나 편한 자리에서 만나보니 생각보다 재미있는 면이 많은 친구 같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달려 김포공항에 도착합니다.


팀장님들! 잘 아시겠지만 출장 시 비행기에서는 본래 팀원들 옆자리 앉는 거 아닙니다.


장거리 비행을 하는 해외출장을 갈 때는 심지어 훨씬 더 멀리 앉는 게 좋습니다. 맞습니다. 아는 사람보다 때론 타인이 더 편안한 법입니다. 비행기 타는 출장의 국룰에 따라 멀리까지는 아니지만 떨어져서 자리합니다. 깜빡 졸았더니 도착했네요. 렌터카를 픽업하러 가서 보니 이 친구가 전기차를 빌려 놨습니다. 둘 다 전기차를 운전해 본 적이 없는지라 기대를 머금고 운전석에 앉습니다. 공항에서 회의장까지 대략 1시간 반정도가 걸리는 길입니다.


제가 먼저 운전하기로 합니다. 저는 가능하면 왕복하는 길에서 한 번 정도는 제가 운전합니다. 본인이 극구 운전하겠다는 홍프로에게 전기차를 꼭 몰아보고 싶었다는 핑계로 결국 운전대를 얻어 냈습니다. 대신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홍대리가 하기로 합의하고 출발합니다.


아~ 전기차는 역시나 승차감이 안 좋습니다. 화석연료 차량에 익숙해진 제 엉덩이는 영 적응을 못합니다. 제가 운전을 하면서도 약간의 멀미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마치 제가 운전을 잘 못해서 그런 걸로 홍대리가 오해할까 연신 변명을 해 봅니다. '차가 예민하다. 엑셀에서 발만 때면 바로 꿀렁이며 멈춘다' 등의 차 이야기로 30분여를 쓰고 나서는 이내 둘 다 익숙해졌는지 재미가 없어졌는지 자연히 회사 얘기로 들어갑니다. 심도 깊은 면담이 시작됩니다.


연구소 개발팀에서 일을 하던 홍대리인지라 본사 상품개발 업무가 맞을까 걱정이 많았었습니다. 주변 얘기로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팀장 말도 듣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었고 유관부서 팀원들과도 자주 부딪힌다고 해서 어떻게 가이드를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열심히 뛰 다니던 대리일 때의 모습과 싱크로율이 높아 남일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 친구 진국입니다. 자기 일에 대한 열정도 강하고 목표 달성에 대한 열의도 대단합니다. 새로운 건 계속 배우려 하며 납기보다 늘 앞당겨 마치는 부지런한 스타일입니다.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그런 데다 아직 대리급이니 얼마든지 두드려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친구입니다. 조심스레 장점들, 잘하고 있는 것들을 얘기해 주고는 조심스레 약간 아쉬운 부분에 대한 대화를 던져 봅니다. 그랬더니 본인도 알고 있다네요. 여자친구가 늘 본인에게 성격을 좀 죽여라, 마음을 좀 가라앉혀라 등의 적절한 조언을 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어허. 거 참 좋은 분을 만나고 있습니다. 일면 부러움이^^;;;. 제가 조언 아닌 조언을 좀 했더니 여자 친구가 한 말과 거의 일치한다고 하네요. 여자친구가 저와 유사한 류의 책들을 읽는다고 하니 이 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습니다.


홍대리 관련된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주 조심스레 방향만 잡아주면 나머지는 본인이 알아서 할 친구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늘 옆에 있는 여자친구가 끊임없이 샛길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줄 터이니 더욱 든든합니다. 한 건 해결했습니다.


일도 잘 마무리했겠다 이제 진짜 데이트할 시간입니다. 이미 긴 이동시간을 활용해서 서로에 대해 충분히 이해도를 높여 놓았으니 이야기 꽃이 무럭무럭 잘도 피어납니다. 아침에 렌터카 업체로 가는 셔틀버스에서 기사님이 추천해 주신 동네 횟집(?)으로 향해 봅니다.


술을 못하는 홍대리이지만 맥주 한 잔을 놓고 제가 소주 2병을 비울 때까지 손발을 맞춰 줍니다. 내친김에 숙소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2차를 해 봅니다. 홍대리는 과일향이 강한, 술을 못하는 저희 와이프가 마시는 써머스비를 한 캔 놓고 제가 커다란 캔 네 개를 먹을 동안 또 이야기 꽃을 피워 봅니다. 수다쟁이도 이런 수다쟁이들이 없습니다. 그렇게 제주도의 밤은 입심 좋은 두 사내의 입김으로 훈훈하게 깊어만 갑니다.




누군가와 둘 만의 추억을 쌓는 건 분명 특별한 일입니다. 특히나 업무를 하면서 둘이 해외 출장을 가거나 해서 오랜 시간 같이 보내다 보면 술자리 몇 번 가질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친밀도 상승의 효과가 있습니다. 이번 출장을 통해 홍대리와 많이 친해진 것 같습니다. 늘 꼬아서 보는 혹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나 좋았겠지 홍대리가 좋았겠냐?' 그렇습니다. 홍대리는 좋지 않았을 수 있겠지만, 아둔한 팀장을 추구하는 저는 홍대리도 분명 꼭 나쁘지 만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미 팀원 6명 중 3명과 해외건 국내건 1박 이상의 둘만의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나머지 세 친구와도 일정을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이왕 인연이 닿아서 한 팀에서 만난 거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요. 오늘은 길지는 않지만 대략 2시간여 달려 2명의 팀원과 국내 출장을 갈 예정입니다. 이동하는 길에 민물 매운탕 한 그릇 먹기로 의기투합은 이미 해 두었으니 오늘의 여행도 깔깔대며 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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