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사계 - 봄(둘째와 함께 땀 흘리며)
나이가 들어서인지 예전보다 적게 먹는 것 같은데 자꾸만 복부에 인덕이 쌓여 갑니다. 근육이 줄어 기초 대사량이 준 것 같은데, 그 주원인이 잦은 음주라는 것을 알지만 어쩌지 못하는 제 자신이 참 딱해 보입니다. 이미 한 칸 옆으로 밀려난 벨트 구멍이 다시금 한 칸 옆으로 밀려날 처지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입니다.
인생이 참 재미있는 게 전혀 의외의 말과 의외의 행동으로 삶의 모습이 홀딱 바뀐다는 겁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큰 아드님은 워낙 먹성이 좋고 공부보다 야구하러 가거나 주무시는 걸 좋아하시기에 중학교 2학년인 지금 이미 저랑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살 어린 둘째 아이는 또래에 비해 작아서 성격도 약간 짜증이 많은 아이로 변한 것 같고 집에서 나가 노는 것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둘째 아이에게 아무 생각 없이 자신감도 키울 겸 '복싱 한 번 해볼래? 권투 있잖아 왜. 치~치~ 하면서 주먹 뻗는 거'라고 던져 봤습니다. 평소 등산을 가자 그래도 힘들다며 짜증 내고, 방에 콕 박혀 아내의 비하적인 표현에 따르면 '싹둑질(종이로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잘라서 테이프로 입체를 만드는 자신만의 놀이)'만 해대던 아이였던 지라 큰 기대 없이 던졌습니다. 역시나 흥~입니다. 그래도 상담받으러 가보기는 했으니 상담받으러 간 김에 집 근처를 한 바퀴 돌았으니 그거면 뭐 나쁘진 않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하루가 지난 일요일 오후쯤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중2 아드님의 한바탕 난리로 집안이 시끄러워졌습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아무 말 없이 자기가 만든 캐릭터들을 가지고 놀 둘째가 쪼르르 오더니 제게 권투 하러 가보자고 합니다. 정말 갈 거냐고 묻자 가보고 싶다고 합니다. 옳다구나 아내에게 구두 보고를 마치고 토요일 상담받았던 곳으로 향했습니다. 때는 이때다 냅다 등록을 하고 첫 운동을 해봤습니다. 스트레칭하고 계단 오르내리기 같은 운동을 했습니다. 3분 하고 1분 쉬는 코스인데 3분이 그렇게 긴 줄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고는 줄넘기와 버피를 하고 기본 스텝을 배웠습니다.
힐끗힐끗 옆에 있는 아이를 돌아보았는데 이 분이 저보다 더 즐기면서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황금 같은 1분 휴식 시간에도 철봉에 매달려 원숭이처럼 흔들거리기도 하고 샌드백에 매미처럼 매달려 낄낄 대며 좋아합니다. 다시 연습 시간. 가드를 올리고 스텝을 밟을 때는 나름 진지합니다. 줄넘기하는 모습을 보니 예전에 제가 가르쳤던 어설픈 모습은 간 데 없고 늠름하게 3분간 쉼 없이 줄넘기를 하는 모습을 보니 제가 무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저와 사이가 좋던 둘째였지만 최근에 약간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제라도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져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어제 저녁에도 일찌감치 일을 마치고 복싱장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종아리가 뭉치고 허리도 쑤시는데 이 분은 건재합니다. 학교만 갔다 와도 힘들다며 학원 안 간다고 하셨던 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쳐 납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자꾸 이유 모를 감동이 밀려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남성 호르몬 감소와 더불어 여성 호르몬이 증가된다고 하더니 코 끝이 찡해집니다. 주착입니다.
샤워를 하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니 끙끙 앓고 계십니다. 평소보다 과하게 몸을 쓰셨으니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런데 잠든 표정이 전에 없이 평온해 보입니다. 역시나 사람은 신체를 많이 움직이고 잠자리에 들 때 비로소 수면의 질이 높아지나 봅니다.
아내는 우스개 소리로 복싱 이틀 했는데 뱃살이 빠진 것 같다며 놀려 댑니다. 이러나저러나 저는 기분이 좋습니다. 언제고 사랑하는 아이와 같이 땀 흘리며 운동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가능하면 저녁 자리도 줄이고 자주 아이와 함께 해야겠습니다. 언젠가 둘이 열심히 수련해서 링에서 만나 주먹을 나누는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