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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Apr 29. 2024

[職四] 마음의 먼지 쓸어내기

직장인의 사계 - 겨울 [덕지덕지 붙은 직장생활의 먼지를 털어내며]

  제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끌탕'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온라인 사전에 찾아보니 '속을 태우는 걱정'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네요. 그런데 직장에서는 이놈의 끌탕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니 맘 편히 살 날이 솔직히 많지 않습니다. 


  윗분들이 모두 출장을 가시는 날, 소위 '어린이날'을 맞이할 때 잠시 찾아오는 마음의 평화는 이내 그들의 복귀와 함께 '인류종말의 최악의 날'로 쉽사리 변하곤 합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손에 내 행복의 정도가 달려 있다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 기본적인 의식주를 충족하고 나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낄 때는 자기가 자기의 삶, 자신의 생활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가장 높을 때라고 합니다. 그만큼 자기 결정권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요. 다들 아시겠지만 직장에서 뭐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있나요? 사소한 비용 지출도 품의를 득하고 지출결의를 마무리 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정말 십원 한 장 내 맘대로 쓰기가 어렵습니다. 가끔 간 큰 직장인 분들이 회사의 자금을 마음대로 쓰시기도 하지요. 물론 대부분 은팔찌 차는 신세로 전락하긴 하지만, 일부는 잘 먹고 잘 살기도 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남의 돈 날로 먹고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건 개인차이겠지만 세상에 날로 먹는 건 없다는, 제 모친인 이여사님의 말씀처럼 어떤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겠지요. 당장 이번 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그 해악이 끼칠 수도 있다는 소위 '카르마의 법칙'까지 들추지 않더라도 우리는 쉽게 그런 예들을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또에 맞아 갑자기 일확천금이 생긴 사람들이 정상적인 행복을 누리기보다 잠시 향락을 즐기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야기도 흔한 마당에, 하물며 남의 돈을 훔치는 도둑질을 하고도 속 편히 산다는 건 어째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다시 끌탕을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일을 하다 보니 이렇듯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로 인해 속을 많이 태웠던 것 같습니다. 맡은 역할이 있다 보니, 사업부의 손익을 개선해야 하는 저로서는 때로는 누군가의 밥그릇을 차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의지를 꺾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소위 나쁜 놈으로 행세를 해야 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앞잡이 역할을 해야 할 때도 있었지요. 물론 이 과정에서 제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지요. 다른 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면서 행복한 사람은 사이코 패스 이거나 극단적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없을 것입니다. 저는 다행히 그런 부류의 정신 이상자는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괴롭습니다. 여러 가지 원치 않는 일들로 여러 사람들과 반목해야 하고 부딪혀야 하는 제 입장이 싫을 때도 있었고, 때로는 도대체 왜들 그리 기존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지 답답한 심사에 또 끌탕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명상에 관심을 가지며 조금은 완화시킬 수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에 붙은 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숫째 가슴을 숯댕이로 만들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으니 언제고 속 편히 웃을 날이 많지 않았습니다. 잠시마나 이 고통을 던져 버리기 위해 알코올샤워를 해 봐도 그날 잠시의 위안을 얻을 뿐이지 다음날은 그 위안의 배에 해당하는 마음의 고통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알코올이나 약물에 의존해서는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다고 하나 봅니다. 마치 가려운 상처를 긁어서 잠시 시원하지만 결국 성이 나서 곪거나 더 오랜 기간의 치료를 요하는 것처럼 술도 마찬가지로 더 큰 손해를 입히곤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술을 제 삶에서 보내 드려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정도로 기억합니다. 그날도 여러 일들로 심한 끌탕을 하다가 도저히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아 에라 모르겠다 툭하고 다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책상 주위를 둘러봤더니 온갖 서류와 잡동사니들로 주변이 어수선한 게 보였습니다. 그제야 제 끌탕의 원인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잡스럽게 살고 있었네요 제가. 정리도 못하는 서류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찾지도 못하게 쌓여 있고, 나중에 해야지 하면서 정리하지 않은 컴퓨터 파일들은 제목을 봐도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난잡한 상태였습니다. 언젠가는 쓰리라 생각하고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경제잡지와 자료들도 제 주변 공간을 적잖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잡동사니 털어내기 프로젝트에 3시간 정도를 할애합니다  우선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서류들을 모두 모아서 분류해 보니 10분의 1 정도만 쓸모가 있고 나머지는 다 세절해야 되는 쓰레기였습니다. 잡지나 기타 물건들도 대부분 보내 주어도 무방한 것들이었습니다. 미련인지 걱정인지 모를 마음으로 덕지덕지 주변에 붙여 놓았으니 속이 편할 리가 있을까요. 단순하고 명료해야 되는데 이리 복잡하게 널어놓았으니 제 심사가 편할 리가 없었겠지요. 주변을 정리하다 보니 마음이 좀 가벼워집니다.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온갖 쓰잘데기 없는 걱정, 끌탕들을 끌어다가 여기저기 붙여두었으니 정신이 사나울 수밖에 없겠지요. 이미 지난 과거의 일들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을 걱정하느라 정작 현재에 살지 못하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서류 하나, 잡지 한 권 버릴 때마다 마음속 아집과 허황된 바램들도 툭툭 던져 놓습니다. 언제고 다시 제게 늘러 붙으려 악착같이 애를 쓰겠지만 제가 이미 알아차린 이 마당에 더 이상의 사기극을 방관하지는 않을 작정입니다. 그렇게 저는 주변을 싹 정리하며 제 마음의 먼지도 훌훌 쓸어 냈습니다. 조금은 편해져서 다시 달릴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또 가다 지치고 끌탕하겠지만, 툭 다 던져놓고 탈탈 먼지 털이를 하면 될 터이니 큰 걱정은 없습니다. 다들 곰곰히 생각해 보고 내 삶에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한 건지, 혹여 덕지덕지 늘러 붙어 내 마음을 잡아 두는 것들은 없는지, 봄날을 맞아 물건이나 생각, 마음까지 한 번 탈탈 털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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