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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Jun 24. 2024

[職四] 직장인의 낭만에 대하여

직장인의 사계 - 가을 (나는 직장에서 낭만을 꿈꾸는 낭만파다!)

    저는 사원시절 낭만 넘치는 직장생활을 했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신규 사업을 하던 사업부라 실적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든 상황이었지만 저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그건 낭만의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팀원 모두 적자탈출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놓고 밤을 잊고 열정을 쏟은 탓에 3년 정도 후에 다행히 적자는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지난하던 3년여의 시간을 나름 즐겁게 버틸 수 있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미래도 없어 보이고 지원도 없어 다른 사업부 좋은 거 먹을 때 구내식당을 전전하던 시절이었음에도 마냥 싱글벙글 열심히 였습니다. 그게 바로 낭만의 힘 아니었을까요.


     낭만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그러니 현실이 너무 힘들었음에도 그것에 얽매이고 휘둘려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서로 포장마차의 대포 한잔으로 위로하며 지낸 시절이 제겐 낭만이 넘치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업부에서도 늘 이상한 눈초리로 저희를 보았습니다. 잦은 제품 불량과 낮은 영업실적 등으로 힘든 영업팀 사람들인데도 서로 마주보고 낄낄대기도 하고 시덥잖은 농담에 다 같이 박장대소하는 모습이었으니 그럴 만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 어려웠기에 오히려 그렇게 서로를 애틋한 마음으로 보듬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제가 근무하는 공간에도 이런 낭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꿈꾸는 사람들이 많고 또 누군가는 그 꿈들을 실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조직이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너무나도 이런 낭만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업부의 손익을 관리해야 하는 팀장의 역할을 하다 보니 저 부터도 너무나 드라이하게 변한 게 아닌가 반성하게 됩니다. 기회가 되면 높은 자리에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힘이 생기면 낭만을 널리 퍼뜨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가고 없습니다. 지금 당장 하지 않는 건 언젠가 나중에도 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건 바로 지금 이 순간 뿐이니 말이죠. 


    지금 사업부의 상황도 어렵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건 물론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을 바로 보았다고 해서, 깨달았다고 해서 팍팍하게만 살 필요는 없습니다. 이따금씩 낭만에 젖어 즐겁게 지내는 여유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회사에 선배보다 후배들이 더 많은데 아직도 옛 생각에 젖어 누군가에게서 낭만을 찾으려 한 것 같아 답답한 마음입니다. 이제 제가 낭만주의자가 되어 보려 합니다. 별 일 없이 '씨~익' 웃으며 다른 이들을 대하고, 실 없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그런 제 나름의 낭만을 실천해 보려 합니다. 


    낭만이 흐르던 그 힘들었던 사원 시절, 언젠가 금요일 저녁 팀원 모두 엠티를 갔던 날이 생각납니다. 경기도의 어느 계곡 옆에 붙은 작은 펜션이었는데요. 늦은 저녁으로 삼겹살과 쏘주를 나눠 마시고는 날이 덥다며 팀장님께서 계곡으로 가서 훌렁 훌렁 옷을 벗으셨습니다. 그렇게 모두들 다 같이 칠흑같은 밤에 허연 몸뚱이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희끄무리한 날몸으로 우린 다 같이 계곡에 입수했습니다. 한여름이었는데도 정말 몸이 부서질 정도로 물은 찼습니다. 정말 창자가 찌릿한 느낌이 들 정도의 시원함이었습니다. 다들 킬킬 대며 좋다고 물을 튀기며, 얼음장 같은 계곡물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투명해져 버린 얼굴로 그렇게 서로에게 낭만의 몸짓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제 젊은 날의 낭만을 이제 매 순간 실천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 있는 후배들에게는 제게 선배들이 해주셨던 것 처럼 그런 넉넉한 낭만의 향기를 나눠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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