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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Apr 01. 2024

[職變] 대리 나부랭이는 입이 없다

직장생활의 변곡점 - 직속상관과의 첫 어긋남

지금 여기는 : 1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현재    


'대리 나부랭이가 어디서 회의시간에 의견을 내냐'라는 분이 새로운 팀장님으로 오셨습니다. 문화가 완전 다른 사업부에서 오시다 보니 제 모습이 더 눈에 차지 않았나 봅니다. 기존 팀장님의 무한 신뢰를 바탕으로 시키지 않아도 일을 하던 제게 담당하고 있는 업체에 대한 의견조차 내지 못한다는 건 뜬금없는 철퇴였습니다. 


언젠가는 회의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회의 시간에 의견을 물으시길래 거침없이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팀장님과 생각이 달랐기에 팀회의 시간에 시시비비를 가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분은 한 마디만 하시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셨습니다. 


잘 나신 대리분 때문에 도저히 회의가 안 된다.

이후에 팀회의가 사라졌습니다.


  믿고 따르던 기존 팀장님과는 정반대의 분이 등장하셨습니다. 재량이나 존중이 아닌 상명하복식의 관리에 포인트를 두시는 분이 오셨네요. 그래도 철없던 저는 예전처럼 열심히 의견도 내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눈치가 없던 저는 제가 하는 방식이 옳은 방식이라 믿으며 계속 밀고 나갔지요. 결국 돌아온 건 정신 나간 놈이라는 평판뿐이었습니다. 전사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기도 한 것 같았구요. 뭐 상관없었습니다. 저도 불같이 뜨겁던 시절이어서 웬만한 찬물에는 꺼질 기미가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직속상관과 부딪히며 살다 보니 회사생활이 재미도 없어지고 의미도 없어졌습니다. 물론 당연스럽게도 퇴사 고민도 했었구요. 


  그러던 어느 날 나름 괜찮은 조건의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었으니 제 마음은 더 흔들렸습니다. 떠날까 말까를 고민하던 그때 문득 지금까지의 직장생활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매일 늦은 밤까지 근무하고 주말근무도 빈번하게 했지만 한 번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더라구요. 더운 여름날 에어컨이 꺼진 사무실에서(그 당시 건물에서는 퇴근 시간과 동시에 에어컨을 껐습니다) 러닝셔츠만 걸치고 땀 흘리며 야근할 때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그 시절의 저희는 깔깔대고 웃으며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열정과 노력을 겸비했던지라 성과도 나쁘지 않았구요. 좋은 분을 만나 쑥쑥 자라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저 순수한 맘으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고, 고객을 설득해서 매출로 연결시키는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굳이 매출이 급격히 늘지 않더라도 한 땀 한 땀 만들어가는 그 길 자체에서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구요. 


  열심히 일해서 닦아 놓은 제 보잘것없지만 자부심이 느껴지는 입지가, 사람들과 진심을 다해 쌓아 놓은 관계가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 그 당시에는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의 탈출을 위해 당시 게시판에 떠 있던 모집공고를 보고 해외 MBA 코스에 지원을 해 봤습니다. 다행히 영어 성적은 조건에 충분히 부합해서 나름 심혈을 기울여 지원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팀장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어이 미스터, 이런 걸 지원하면서 팀장하고 상의도 안 하나?


  맞습니다. 100% 제 잘못입니다.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넘어선 지라 그냥 무시를 하고 싶었나 봅니다. 머리만 짚풀에 박고 '나 잡아 봐라'하는 닭처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닭대가리 같은 낯 뜨거운 행동을 한 거지요. 그래서 착각은 자유인가 봅니다. 소속 팀장과 상의도 하지 않고 덜컥 낸 지원서를 받아줄 회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절대로 직속상관과 척을 지면 안 됩니다. 상사, 특히 직속 인사권자는 저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 하더라도, 제 앞을 막을 힘은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까요. 좋은 기회가 있어도 직속 팀장이 '얘는 이런저런 결점이 있는데도 그렇게 하시겠다면 하시라'라는 애매한 코멘트만 달아도 백이면 백 그 기회는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로열 패밀리 이거나, 저 높은 곳에 든든한 빽이 있지 않는 한, 적어도 직속상관과 척을 지지는 말아야 회사에서 생존해 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무조건 손바닥 비비는 아부와 무조건적인 동의를 하며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인 인간 사이의 예의를 지키라는 것이지요. 집에서도 어디 갈 때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가족과 상의하잖아요. 직장에서도 이런 기본적인 예의를 잘 지키면서 그런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놓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저와 같이 이런 활동에 약간의 결벽이 있는 사람들은 '정치'라고도 부르는 활동이 되겠습니다. 직장에서 이 '정치'는 아주 중요합니다. 결국 정치라는 건 제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는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리 작업하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의 어두웠던 과거에서 배울 건 많지 않지만 아래 사항들은 기억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리 나부랭이도 입은 있으나 그 입은 늘 잘 놀려야 된다. 

모든 직속상관을 존경할 필요는 없지만 존중은 해야 한다. 특히나 인간적으로.

직장도 결국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예의를 지키시라.



  월요일 아침부터 철없던 날들을 끄집어 내니 낯이 뜨겁습니다.

  어제 등산을 하다 보니 날이 너무나 좋더군요. 드디어 태양의 선물을 받으러 산으로 들로 나설 시간입니다. 4월의 첫날, 나들이 계획을 세우며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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