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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i eun Dec 21. 2023

세상에 남겨진 건 아빠와, 언니, 나 총 셋이었다.

서글픈 저녁밥

그렇게 엄마를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남은 건 아빠와 나, 언니 총 셋이었다.


당시 나는 초등 1학년 생이었고, 언니는 열여섯, 아빠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나는 오랜 시간 참으로 순수했던 거 같다. 지금 세상의 아이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날 만큼 나는 너무도 세상을 몰랐다. 지금의 아이들은 여덟 살에도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나는 죽음이라는 것의 개념을 전혀 알지 못했다. 엄마의 발인날, 묘지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정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대성통곡을 하였는데 나는 사람들이 왜 그리 우는지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하다, 버스 안의 모든 이들이 우는 것이 무섭기만 하여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이 아이처럼 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안 날이기도, 그것이 꽤나 나에게 큰 불안을 안겨준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그 정도로 나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쩌면 그 ‘덕’에 나는 엄마의 부재에 오랜 시간 무딜 수 있었다.


반면에 언니는 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중학생 3학년. 시간 지나 생각해 보면 한창 반항할 시기이고, 세상에 나와 질풍노도를 겪을 시기였다. 그리고 하필 언니는 그 나이에 엄마를 잃어버렸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언니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 언니는 그 시절 우리가 살던 포항을 떠나 경산으로 기숙사에 들어갔다. 하여, 포항엔 아빠와 나만 남게 되었는데, 아빠는 그때에도 부풀어진 대로 부풀어진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집 밖을 겉도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이주에 한번 집에 올까 말까 한 정도였으니 거의 홀로 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았을까. 그때에도 나는 한창 어린 나이였는데 집에 들어오는 이 없으니 집에서 혼자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들은 혼자 집에서 잠을 청하거나, 친구네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잠을 해결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언니가 대학엘 들어가고 내가 홀로 집에서 잠을 자고 생계를 유지하던 시기가 고작 열두 살이었다는 사실이 가끔은 나를 아주 서글프게도 한다. 왜냐하면 난 그때 그 생활에 단 한 번도 환경에 원망해 보거나 그 누굴 탓해본 적이 없으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감수해 나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겪었던 이 어린 시절의 수많은 일들을 다시금 곱씹어보면, 스스로도 놀랍고 신기하다. 어떻게 그 엄청난 일들을 당연하듯 스스로 감수하고자 했는지, 그 누구도 원망할 생각도 없었는지, 내 환경에 서글픔조차 느끼지 못하고 아픔을 삭힐 수 있었는지. 커서 생각했을 때 그 어린 나에게 드는 연민은 내게 꽤 크게 자리 잡아 조금은 슬픈 추억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내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아주 오랜 시간 친구들 덕이었던 날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마음을 쏟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친구들의 순수하고도 원시적인 사랑을 참으로 많이 받았다. 점심은 학교에서 급식을 먹더라도 저녁은 거의 늘 굶기 일상이었는데, 친구들은 제 집에 데려가 항상 나의 끼니까지 함께 하게 하였으며 때때론 김밥 같은 것들을 사서 우리 집에 와 내게 건네기도 했다. 고작 초등학생 5학년, 6학년이었는데.

친구들이 저녁식사자리에 날 제 집으로 데려가, 둥글고 네모난 식탁 위에 앉혀놓을 때면 나는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친구의 부모님들이 티 나지 않게 애써 웃음 짓는 얼굴 뒤로 날 진심으로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걸 난 이르게 느끼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빠르게 발달한 것이 눈치 보는 것이었으니까, 감정을 캐치하는 건 내게 아주 숙련되고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이 사람이 지금 날 환영하는구나, 환영하지 않는구나.’

환영받지 못하는 식사자리에 어린 친구의 손에 이끌려 초대되는 날이면 그것이 날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뿌리칠 수만은 없었던 게, 그것이 내 생계였기도 했으니까 그저 어렵사리 웃어 보이는 얼굴 앞에 “감사합니다.”를 연신 고개 숙여 말하곤 밥 한술한술을 떠먹는 것이었다.

아마도 아빠는 상상도, 생각도 못했을 테고 여전히 그 사실을 모를 테다. 거의 몇 년을 그렇게 지내왔는데, 아빠는 한결같이 집에 들어오질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난 항상 아빠의 사랑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는데, 그 어린 내가 홀로 밥을 먹지 못하고 매일 밤을 떨어가며 잠들었다는 사실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조차 떠올리지 못할 만큼 아빠의 삶이 너무 버거웠던 걸까. 그 생각과 의문, 원망이 아주 훗날 많이 많이 크고서야 뿌리 나기 시작했다.



언니가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터를 잡고 지내던 어느 날, 나를 데려와 함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던 날이 있었다.

숙식에 대해선, 대개 친구들 집을 연연하며 해결할 수 있었는데 집에서 혼자 있는 날이 길어질 때면 때로 밥을 굶는 날도 여럿 있었다. 초등학생, 중학생 때는 늘 그렇게 점심은 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고 아침은 먹지 못하더라도 점심까지 참아낼 수 있었다. 그건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라면 저녁이었는데, 굶주린 배를 붙잡고 겨우내 참아내거나 늘 천 원 정도 쥐어진 돈으로 아끼고 아끼며 시장으로 걸어가 검은 봉다리에 소중하게 담아 온 떡볶이로 해결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 당시 떡볶이 1인분에 1000원이면 나에게 충분했으니까. 그 이상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음식은 없었다. 하여 떡볶이나 초코바, 오백 원짜리 소보루빵이 나의 가장 큰 식사거리였다. 분명 초등학생 5, 6학년이면 스스로 밥을 해 먹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왜 그러지 못했냐고 묻는다면 그 당시 아빠와 내가 살던 집을 보여줘야만 설득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주 가끔 음식거리가 부엌에 있으면 그걸 어쩌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 부엌엔 파리며 벌레들이 들끓었고 직접 요리를 해 먹기엔 나는 꽤 많이 어렸다. 아주 가끔 천 원 이상의 돈이 내 수중에 생기면 신나게 마트에 들러서 사와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었던 것이 인스턴트 죽이었으니, 아마 라면을 끓이는 방법을 누가 알려주거나 해주지도 않았던 기억이다. 아주 가끔 아빠가 해주는 음식이었다면, 천원도 안 되는 돈으로 살 수 있었던 오뚜기 가루스프. 냄비에 가루를 풀어 물만 담고 열심히 저어가며 끓이기만 하면 되었던 맛난 스프. 그 스프 하나면 며칠을 굶주리지 않아도 되니 가끔 나도 흉내 내어해 먹었던 것도 같다. 기억해 내면 조금은 가슴이 아파, 서서히 사라져 가는 서글픈 내 추억이자 저녁거리들.


주말이었을까, 이틀에서 삼일정도를 꼬박 굶은 날이 있었다. 꼬박 굶었다는 건 정말로 삼시 세끼 하나도 챙겨 먹지 못했다는 뜻인데, 아마도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전히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내게는 떡볶이를 사 먹을 천원도 쥐어있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너무 절박했던 걸까. 멀리 살던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울면서 전화를 걸었는지 꾹 참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단지 내가 며칠 밥을 못 먹어서 배가 너무 고프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만 전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포항에 여전히 남아있던 언니의 고등 학창 시절 친구 한 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당시 빚독촉자가 아닌 이상 집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내 친구들 밖에 없었다. 찾아올 이 없고, 문이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는데 그건 오랫동안 겪어온 나의 트라우마와 같았다. 문 노크소리, 전화벨 소리.

다행히도 이날은 내가 오랫동안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었는데, 문을 두들기는 소리 이후 곧장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귀은아~~!! 귀은아~~!!! 언니 귀란이 언니 친구야~” 그 목소리가 얼마나 나에게 큰 안도감을 주었는지 모른다.

경계심을 풀고 문을 열었을 땐, 문 앞에 서있던 언니 친구가 외투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어온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펴고 있었다.

초록색 지폐는 내가 언제 쥐어봤지? 언니의 손에 들려있던 만원이 이내 내 손에 들렸고 이걸로 꼭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정답게 손을 잡아주던 그 언니의 모습도 기억이 난다.

‘다급하게 왔구나. 스쿠터까지 타고, 급한 심호흡소리가 들려.’


훗날 언니에게 들었다. 이 날, 내 전화를 받고 날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했다던 언니의 다짐을.

잊고 싶었다고 했다. 엄마가 죽고 언니와 나, 아빠, 총 셋이 남았을 때 겪은 일들은 모두에게 상처였다. 언니는 수없이 아빠의 빚독촉자들에게 협박전화를 받았고 그들을 피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술만 마시며 게임방을 전전했으며 어린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언니는 그 지긋지긋하고 무거운 삶들을 잊어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 전화를 받아 들었던 이날, 언니에게 열 살이 가까운 아랫동생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고 했다. 도망 아닌 도망을 치고 있었던 그 삶에 잊고 있던 어린 동생의 삶과 존재를 그제야 인지해버렸다고. 아차, 싶었다고.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때, 아빠는 급히 포항을 떠나 충청도로 떠났다.

도피하듯 떠난 아빠는 먼 충청도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그렇게 나는 포항에 홀로 남겨졌다.

영문을 몰랐던 나는 그 잠시 사이에도 참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했는데, 그것 또한 아빠는 절대로 알 수가 없을 테다. 물론 언니까지도. 아니, 그 누구도.

오랜 시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도 내가 겪었던 비참하고 무서운 일들을 아빠는 앞으로도 영영 모를 테고, 먼저 포항을 떠나 먼 충청도로 가고 나 홀로 남겨졌을 때 겪었던 무시무시한 일들도 아빠는 죽을 때까지 모를 테다. 나 혼자 겪은 일들이니까.

당시 아빠가 떠나고 홀로 남게 된 집은 아빠가 사기를 당한 월세집인 듯하였는데, 빚독촉자에 더해 술에 취한 집주인까지 집 문을 몇 날 며칠 연신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밤마다 이어졌고 나는 집에 없는 사람인 양 불을 끄고 두려움에 떨며 잠에 들어야만 했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거다. 그 누구도, 그 두려움을 헤아릴 수 없을 거다. 그 두려움이 얼마나 깊이 내게 박혀버렸는지 그 누구도, 모를 거다.


그러던 중 친구 중 한 명이 내가 혼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본인의 집으로 데려갔다. 다행히 그 집 어머님은 날 정말이지 진심으로 온정을 다해 환영해 주셨고, 이번엔 숨기지 못한 감정에 미움이 아니라 애틋함과 동정심이 품어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 집에 머무르는 이주동안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랑에 기대어 쉴 수 있는 편안함. 그 이주가 지나고 부산에서 소식을 들은 이모 한 명이 포항으로 와주었고, 날 데리고 부산으로 거처를 옮겨주었다.

한동안은  이모, 한동안은  이모, 이모들의  옮겨 다니며 전전하다가 언젠가 이모들의 집으로부터 독립해 나와, 언니가 살던 자취집에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는, 대학생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언니와 한 집에 살며 거처를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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