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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i eun Dec 27. 2023

악몽 같은 전화벨소리와 문노크소리.

트라우마1


고등학생 때 비로소 진로를 정하고 진정으로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던 꿈이 ‘연기’라는 업이었다. 처음 시작은 진로나 미래라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던 동생에게 건넨 언니의 제안으로 시작된 나의 꿈이었지만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대학시절을 보내던 시기는 내 직업을 두고 수많은 의미를 찾고 그것을 다져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중 하나이자 내게 가장 큰 의미, 그 시절 나의 일기장에서 수없이 언급되었던 의미. 그리고 내가 연기를 잘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수없이 독촉하고 몰아세우기도 했던 의미.


나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그 모든 시절에 특출 나게 잘하거나 끈기 있게 흥미를 붙이는 일이 없었다. 초등학생 때는 글을 잘 쓴다는 명목으로 많은 상을 받았지만 글 쓰는 것에 길게 흥미를 두지 못했고 중학생 시절에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이유로 당시 내가 살던 ‘포항시’의 시대표로 전국 그림대회에 나가 서울 도심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지만 그것 역시 오래가진 못했다. (아빠는 이 시절을 두고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이 당시 그림을 그릴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두고두고 후회하고 한탄을 하는데 환경이 주어졌다면 내가 정말 그림을 오랫동안 그렸을까? 업으로까지 이어졌을까? 그건 정말 모를 일이지만, 쉽게 지루함을 느끼고 빠르게 흥미를 곧잘 잃어버리는 내가 그림이라고 다르진 않았을 거 같다. 정말 모르긴 하지만.) 입시와 같은 공부는 지금 다시 하라고 한다면 오히려 ‘감사합니다!!’ 외치며 열심히 할 자신이 있지만 어릴 적 나는 공부에 대한 흥미는 애초에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으며 복잡한 수학과 같은 것들은 대체 내 삶에 무슨 유익함을 가져다주는 것이길래 내가 이리도 몰두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만 가져본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정말로 나는 초중고시절 유난히 잘한다는 것이 없었는데 성적 또한 그랬으니 앞날에 대한 생각은 못 가졌어도 그런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던 것은 확실하다. 언제나 뭐든 척척해내는 모든 다른 친구들이 내 눈엔 신기하기만 했으니까, 한없이 스스로가 작게 느껴졌을 테다.


그런 내가 대학생이 되고 연극영화과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깨닫게 된 것은, 나에게 아주 큰 재능과 능력이 하나는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쓸모 있고 누구보다 특출 난 능력. 그것이 나의 직업에 큰 재능을 가져다주는 능력.

그것은 나의 슬픈 기억과 경험과 아픔이었다.


30대가 된 지금은 경험이랄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상실을 일찍 겪은 것일 뿐이지만 그 시절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그 많은 일들과 내 머릿속 기억들은 또래의 친구들 중 나만이 겪을 수 있는 일이었고 나만이 알 수 있는 삶의 영역이었으며 그것을 심지어 능력으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일들을 빠르게 겪었고 좀 더 다양하게 겪었다는 것은, 내가 더 많은 사람들을 폭넓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감대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것을 마음으로 진정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는데 그게 일상에선 무슨 능력이겠냐만은 ‘연기자’라는 직업에서는 능력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남들보다 더 감각적으로 뛰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 드는 것이 생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연기만큼은 잘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것만큼은 놓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대학생 1학년, 첫 연기과제는 ‘극적 즉흥상황극’.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짧은 시간 동안 극적인 상황을 만들고 그 상황에 몰입하여 연기를 해내고 그것을 무대화하여 공연을 올리는 것이었다.

모든 희곡이 그러하듯 최고의 ‘극적인 사건’이 있어야만 했고 그 극에 달한 상황에 커다란 심리적, 육체적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다르게 말하면, 커다란 충격을 받을 만한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야 했고 그 상황에 놓여야 했고 그것을 무대에 그대로 옮겨내야만 했다. 그리고 교수님은 그 극적인 사건을 허구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본인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삼길 원하셨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내재되어 있는 가장 극한의 감정을 마주하고 그것을 꺼내어놓고 무대 위에서 표출할 수 있기를 원하셨던 거였다. 큰 슬픔, 큰 고통, 큰 아픔, 큰 기쁨, 큰 행복, 예상치 못한 슬픔과 행복 등 그 모든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이 첫 번째 과제라고 여기셨던 것이다.




그리고... 극적인 사건을 떠올리는 데에 내겐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트라우마로 남은 질기고 긴 시간들이 내게 완전히 아물기 전이었으니까ㅡ.







기억이 생생하다.

커다란 이불, 담요들, 커텐, 스티로폼박스.


엄마가 돌아가신 뒤 내게 깊게 박힌 무섭고 두려운 트라우마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잊지 못할 트라우마라면 단연코 전화벨소리와 노크소리였다.



초등학생시절부터 시작되었다. 하교를 하고 집에 도착하면 가방도 벗기 전에 집에 있는 모든 암막커튼부터 치는 일.

방에 있던 작은 티비를 켜고 최대한 작은 볼륨만을 켜놓은 채 불이란 불은 일제히 켜지 않고 밤이 오고 잠에 들 때까지 오로지 희미하게 튀어나오는 티브이 불빛에 의지한 채 하룻밤을 견뎌내는 것. 그것은 매일같이 찾아오던 빚독촉자들에게 집에 아무도 없음을 알리는 나의 유일한 신호였고 문이 열릴 때까지 부서질 듯 노크하던 문소리는 내가 숨죽이고 귀를 막고서 이불속에 파묻혀 그들이 제발 발걸음을 뒤로하기만을 기도하며 덜덜 떨어야만 하는, 생명의 위협을 알리는 무서운 존재였다. 우렁차게 연신 손마디가 처박혀 울려대던 노크소리는 현관을 무섭게 울려댔고 적적한 집안의 공기를 단번에 뒤바꿔놓았다. 그 노크소리가 점점 몸을 불려 곧 문이 부서질 것만 같았고 그들이 언제고 우리 집 문을 따는 건 예삿일도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열린 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와 나를 범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나는 항상 노크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곤 했다. 그 시간을 몇 년 동안 보냈다. 질기고 긴 밤은 혼자여서 무서웠던 것보다 맹렬하게 두들겨지는 노크소리와 벨소리 때문이었다.


집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하면 노크소리와 같이 두려움이 또다시 시작된다.

-띠리링-띠리링-띠리링-띠리링-

높은 음역대를 자랑하고 빠른 박자를 가지고 연신 울려대는 띠리링-소리는 제일 날 두렵게 하는 소리였다. 너무너무 무서웠다.

그냥 무서웠다. 마냥 무서웠다. 띠리링-이 다 울리기도 전에 띠- 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건 적응되지 않는 소리였다. 무뎌지지, 아니 무뎌질 수가 없는 소리였다. 두려움이 지배해, 전화코드를 뺄 수도 없었다. 코드를 빼버리면 집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일이니까, 전화를 건 독촉자가 당장에 우리 집으로 찾아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끊길 생각이 없는 띠리링-소리를 끝까지 들어야만 했는데 그 소리는 밤늦도록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 소리에 노크소리까지 더해지면 심장이 너무 요동치고 두려워서 사라져 버리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날의 밤은 길고도 너무 길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 그건 누구에게나 있다.

본능적으로 나오는 행동, 그건 내게 이불과 담요들, 스티로폼박스였다.

가끔 집에 생기곤 하던 하얀색 사각 스티로폼이 있으면 그 스티로폼박스에 전화기를 조심스레 넣어두고 집에서 보이는 이불과 담요란 것들은 죄다 끌어내 전화기가 담긴 스티로품 박스 위로 덮고, 덮고, 또 덮어가면서 껴안았다. ‘소리가 제발 안 났으면 좋겠어.’ ‘이 소리를 내가 듣지 못했으면 좋겠어’

그 간절한 마음에 어떻게든 전화벨 소리를 낮추고 싶어서 본능적으로 움켜 들었던 스티로폼박스들과 이불들, 담요.




막을 수 없이 삐져나오는 억척스런 전화벨소리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귀를 막고 싶어 안달복달 못하던 초등학생. 그게 나였다.




그 시절 그 단편적인 내 모습이 아주 오랫동안 자주 떠올랐다. 작은 체구를 끌고 커다란 이불을 감싸 안아 처참하게 전화기 위에 쌓아 올린 더미들 위에서 숨죽이며 울던 나.


기억 속 그때의 나는 참으로 작았다.


자주 떠오른 그때의 장면들은, 어느 새부터 과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집마다 있던 전화기라는 것 자체를 보기가 드물어졌으며 저마다 핸드폰으로 소통하는 세상이 되었고, 경박하게 울려대던 '띠리링-'소리는 어디서도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날들을 떠올리게 하는 빚독촉자도 내겐 없어진 지 오래다. 포항을 떠나고 나서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 되어 점차 기억이 퇴색되어 갔다. 더불어 그 불안과 트라우마도 자연스레 사라져 갔고 이제는 지금 시대에 상상할 수 없고 맞물리지도 않는 어릴 적 기억이 되어버렸다.

이것 역시, 나 혼자만의 기억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누구에게 얘기해도 믿지 못할 이야기. 혼자 담담하게 껴안고 묻어야 할 이야기 중 하나.


그리고 지금의  삶을  감사하게 만들어주는 시절  하나가 되었다.  트라우마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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