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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i eun Dec 14. 2023

스물 다섯의 일기

우리 엄마 2.




2017년 12월 31일 늦은 저녁.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몇 시간 전인 지금, 나는 급히 부산으로 내려와 자그마한 장례식장에서 친가 댁 사촌오빠 세 명과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홀로 지내시던 둘째 큰아버지의 장례로 인해 우리는 연말과 신년을 가족끼리 만나 함께 하게 되었고, 아무도 들르는 이 없는 적막한 이 장례식장에서 조카들인 우리끼리 얼큰하게 술 한 잔씩 들이키며 사는 얘기들을 나눈다.

어느새 얘기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 엄마에 대한 주제로 넘어왔다.

빈 술병은 이미 장례식 한쪽을 가득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옆에선 사촌오빠들이 조금은 벌게진 얼굴과 한 껏 업 된 호흡으로 기억을 되짚어 그려내는 엄마. 그녀에 대한 기억과 묘사를 듣는 이 시간들이 나는 너무도 좋다. [어쩌면, 엄마를 기억하고 상기시킬 때에 사람들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 속엔 남아있지 않은 엄마의 모습을, 그들의 기억들과 언어들로 그려본다. ‘엄마의 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 얘기를 듣는 내내 이런 엄마의 딸이라는 사실에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간다.

여러 사람들의 기억 속의 엄마는 하나의 사람으로 그려진다. 보통 한 사람을 두고 기억하는 바가 여러 시각과 관계에 따라 다르기 마련인데, 엄마에 대한 기억은 많은 이들에게서 참으로 한결같다. 그녀를 회상하는 동안 모두들 같은 순간에 머물러있는 모습을 나는 본다. 너무도 따스하고 행복한 표정, 미소, 반짝이는 눈동자를. 그것은 그 순간으로 돌아가 엄마와의 추억이 회상된 그들의 한결같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모두에게 기억되어 있었다.

언제고 한결같이, 누구에게든 따뜻했던 사람.



엄마는 그 시절 보기 드문 신여성 같았다고 한다. 생활력이 강했으며 손재주가 많아서 온갖 옷이며 생활용품들을 직접 재봉하고 뜨개하며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선물하는 사람이었고, 여행 다니고 바깥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음식을 무~~~~~~진장 잘해서 (정말로 다들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맛있게 잘했다고!) 친가, 외가, 아빠의 친구들, 엄마의 친구들 등등 너 나 할 것 없이 엄마의 음식을 좋아했고, 무엇보다도 엄마는 사람을 너무도 좋아하는 여자였다. 많은 이모와 삼촌들 사이에서 맏이였던 터라 책임감이 유독 강했고, 일과 공부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어린 학창 시절, 아빠와 결혼을 결심한 때를 비롯해 가정을 이루고 난 이후의 생활동안 엄마가 오래도록 일본에 계신 나의 고모할머니께 은밀하게 써붙인 편지들이 있었는데 그 속에서 나는 남들에게 내비치지 못한 혼란과 갈등, 두려움과 나약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지혜로운 엄마 역시 엿보고 상상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선 고모인 나의 일본고모할머니. 일본에 계신 고모할머니를 엄마는 유일하게 의지했던 거 같다. 솔직한 마음 그대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 가족 누구에게도 하기 힘들었을 속내의 것들을 엄마는 오랫동안 일본고모할머니께 편지로 써 붙였고, 할머니는 오랜 시간 간직해 온 편지들을 내가 스물세 살에 여행 차 갔던 일본에서 내게 건네주셨다. 동갑내기 사촌 둘과 함께 고모할머니의 초대로 히로시마에 여행을 갔을 때였다. 모두가 자던 시간, 잠이 오질 않아 거실에서 혼자 맥주를 홀짝 거리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께서 조용히 다가와 편지봉투 몇 장을 건네주셨는데 그것이 엄마의 긴긴 편지들이었다. '이제는 컸으니 이 편지들은 네가 들고 있는 것이 좋겠다'며. '이제 그 편지들은 네 것이라고.')


엄마를 오랜 기간 보며 자라왔다면 아마도 엄마를 동경하고 따르며 커나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에게서 듣는 엄마가 좋았다. 무엇보다, 말재간이 좋아서 유들유들하게 시어머니의 쓴소리를 재치 있게 피해 가면서도 그 예민하고도 엄격한 시어머니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엄마의 센스가 마음에 들었다.

“넷째 큰어머니는 워낙 성격이 유들유들하셔서 할머니가 따박따박 큰 소리를 치셔도 부드럽게 웃으면서 어머님~ 하며 재치 있게 잘 대처하셨을 거야!! 할머니 이기는 사람 없었댔잖아. 첫째 큰어머니도, 셋째 큰어머니도, 우리 엄마도. 할머니가 며느리들한테 얼마나 고약하게 굴었는데. 분명 큰어머니도 힘들었을 텐데 절대 미소를 잃지 않고 끝까지 대하셨다잖아. 다들 등 돌리고 힘겨워할 때도."

엄마의 모습을 그려내는 사촌오빠를 보며, 나 역시도 엄마의 그러한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더니 마음이 뭉개 뭉개 웃음꽃으로 가득해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엄마처럼 예쁜 마음을 가지지 못할까, 나는 왜 그런 유함이 없을까, 엄마와 같은 센스나 강한 생활력은 왜 나에겐 없는 걸까?’ 하며 엄마에 대한(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를.)그리움을 또 품는다.


-2017.12.31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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