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wi eun Dec 16. 2023

귀하고 은혜로운 아이, 사랑받은 아이

엄마의 죽음

내 이름은 강귀은. 진주 강, 귀할 귀자에, 은혜 은. 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귀하고 은혜로운 아이라고 지어주신 이름이겠지.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가 지어주신 내 이름만 보아도 나는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을 풍만하게 자라 온 귀한 아이였는데, 그것을 나는 왜 그토록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왔을까.

현재 내 나이는 만으로 25세. 내 친구들은 만으로 26세. 내가 빠른 생일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친구들과 같은 나이로 말하자면 27세. 내 이후의 어느 시점부터 빠른 생일이라는 제도를 없앴다는데, 왜 빨리 없애지 않았을까 싶다. 늘 나이를 말하자면 25살이라 해야 할지, 26? 27이라 해야 할지 참 난감하다. 그래도 빠른 생일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의 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1월생이라 93년생인 내가 92년생인 지금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음에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정말 식상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친구란 보물과도 같은 존재다. 아니, 해 같은 존재라 해야 할까. 친구라는 존재는 나에게 있어서, 날 비춰주고 살아있음을 그나마 느낄 수 있게 해 준 가장 고마운 존재라 해야 마땅하겠다. 지금에서야, 가족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소중하고 따뜻한 존재로 살갑게 다가올 수 있지만 오래도록 나는 가족이란 단어보다는 친구라는 단어가 오히려 가족과 같았다. 가족이 있어야 할 자리에 늘 친구들이 있어줬으니까.

그건 아마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나고부터 줄곧 그래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닌 거 같다.



엄마는 내가 여덟 살이었던 1999년 6월에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아빠는 포스코라는 대기업에 다니셨고, 나쁘지 않은 수입을 가졌겠지만 아빠만의 이유가 있었음에 주식을 끊지 못하고 나날이 빚이 늘어만 갔었다. 여덟 살까지 엄마와 함께 했던 기억은 남는 게 거의 없으나, 집을 수 없이 이사했던 것만큼은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엄마와 마지막 추억을 함께 했던 집은 엄마 살아생전에 가장 초라하고 서글픈 집이 아니었나 싶다. 훗날에야 내 기억이 많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그 집이 초가집이었다고 기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언니와의 대화 도중에 그 집이 초가집이 아니라 기와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희미한 기억을 되짚어보자면 지붕 처마 밑에  제비집이 있었다. (맞다.  제비집은 제대로  확실한 기억이 맞는데, 아마도  제비집의 형상 때문에 우리  지붕마저도 초가집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같다.)  제비집이 꽤나 컸었는데 엄마제비가 새끼제비들을 거기서 열심히 키우는 탓에 거실 방문을 열면, 제비들이 순식간에 들어와  안을 휘젓고  머리 위에 하이얀 똥을 누기도 하였다. 그때에 엄마는 어떻게든  안에  내밀 구석 하나  만들려고  건너편에 자그마한 분식집을 하나 차렸었다. , 분식집하니까 기억나는 엄마와의 추억이 하나 생각난다! 내가 1월생이고, 엄마가 돌아간 때가  여덟  때였으니까, 여덟 살이  해의 1 달에 그러니까, 엄마가 돌아가시기  5 전쯤인 듯하다. 그때에 몇몇의 초등학교 친구들을 분식집에 초대해, 엄마 혼자서 뚝딱 만들어  수많은 분식과 음식들, 생일케이크로 나의 여덟  생일을 축하해 주셨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작은 딸의 생일날은 거르는  없이 거나한 잔칫날 마냥 이벤트 가득한 파티를 만들어서 누구보다도 사랑을 듬뿍 담아 축하해 주는 사람. 돌아보니, 그때야말로 엄마의 살아생전 어느 때보다도 퍽퍽하고 힘든 삶이었을 텐데  앞에선 웃음을 잃지 않고 굳세고 강인하고 사랑이 넘치는 엄마였던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무엇보다, 딸에게 있어서는 이벤트의 여왕이셨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있는 동안만큼은 누구보다도 사랑을 많이 받는, 공주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물 다섯의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