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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는 오랜 후에 알게 돼요

DIVE #2 다이빙은 왜 시작했어요?

by 귀하다 Oct 3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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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이 질문이 나온다면 아, 이제 인터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구나 생각하면 된다. 거의 모든 인터뷰의 공식질문이다. 내가 방송일을 하며 받은 질문 중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질문이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었다. 다음 작품이 결정되지 않았을 때 그 질문을 받으면, 일하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일할 수 없는 내 삶이 뭔가 내가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는 듯한 기분에 위축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이 있는 것처럼 뭐라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불편했다. 그렇지만 아무 계획이 없다고 말하기엔 자존심이 상하기도했고 너무 무성의한 사람처럼 보여 자칫 질문자에게 결례가 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최근 내 인생 이야기를 아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작가님과 사전 인터뷰를 하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나도 어느덧 17년 차 방송인이라 이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상대가 일을 위한 요점 대화를 하고 있는지 감성적으로 나와 교감을 나누는 중인지 알 수 있다. 상대가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어서 일반적인 전화 인터뷰보다는 통화가 길어졌다. 역시나 마무리 즈음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작가님이 물었다.      


전 계획 없이 사는 게 계획입니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을 바꿀 만큼 대단하게 빛나는 사건들은 언제나 계획하지 않은 일이었어요. 남편을 만난 일, 다이빙을 시작한 일. 오히려 계획했다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나를 아프고 좌절하게 했어요. 그냥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들 성실하게 하면서 계획 없이 살고 싶어요.”     


나이가 안겨준 덤덤함일까. 마흔이 넘어서야 드디어 생각하던 대로 말해봤다. 다행히 작가님은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으며 위안받을 거라고 하셨고 난 비로소 계획도 없이 사는 내가 덜 멋지게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랬다. 나는 다이빙을 그렇게 계획 없이 갑자기 시작했다. 시작 전에 잘 알아보지도 않았고 그 시작이 이렇게 내 삶을 바꿔놓을 대단한 사건일 줄 몰랐다. 시작은 그당시 어떻게든 잠시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답답함에서 떠올린 우발적인 선택이었다.


2012 120부작 일일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다. 당시 메인 러브 스토리의 삼각관계   축을 담당하는 주연으로 드라마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방송이 시작된  이야기가 대폭 수정되면서  회에 한두  나오는 단역이 되었다. 속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제일 마음이 아팠던  오랫동안 짝사랑해오던 친오빠의 절친과 20 정도부터 본격적인 삼각라인이 시작된다고 해서 열심히 짝사랑 연기를 해오고 있었는데 어느  더는  상대를 좋아하는 연기를 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였다. 고백    해봤는데  짝사랑의 당사자도 아닌 다른 이가 사랑의 끝을 종용한 느낌이어서 당시엔  배역이 작아진 것만큼이나 배역 인물로서의 감정적 상실도 컸다.


벌써 10년 전이라 지금은 드라마 현장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일하는 환경이 워낙 변수가 많은 곳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며 즐겁게 일하려고 마음먹었다. 사실 그 전까지는 미니시리즈만 해봤기 때문에 또래 연기자들과 많이 일했었는데, 일일 드라마를 하게 되니 어린 시절부터 티비 속에서만 뵙던 부모님 세대의 선생님들과 함께 대본을 읽고 연기를 하게 되어서 배울 점이 많았다. 그런데 마음 단속은 내 것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생각해주시는 분들의 위로가 매일 눈과 귀로 쌓이다 보니 조금씩 자신감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너만 보면 속상하다. 내가 너라면 정말 화날 거다. 우리 송현이 어떡하니."   

   

처음엔 괜찮다고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진심으로 웃었는데 반복되는 위로 속에 

혹시 내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하는 것일까?’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워졌다. 왠지 내가 웃으면 가식적인 사람 같았고 그렇다고 울상을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 가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올림픽 중계 때문에 드라마가 3주 결방을 하게 되면서 생긴 1주일의 촬영 공백은 내게 절실히 필요한 분리의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 일주일 동안 활동적인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방구석에서 동굴을 파고 지하 세계로 들어가 우울함의 늪에서 허덕이다가 참혹한 모습으로 현장에 복귀할 것 같단 불안감이 가득했다.      


뭔가 새로운데, 일주일 만에 완성된 과정 하나가 끝날 수 있는 것. 이왕이면 비행기 타고 나갈 수 있는 것. 이 전에 다른 작품을 할 때 만났던 스텝이 스쿠버다이빙이 참 좋은 스포츠이니 꼭 한번 해보라고 말했던 게 떠올라서 나는 갑자기 그렇게 다이빙을 배우게 되었다.      


다이빙 입문자 레벨을 Openwater Diver 라고 한다. 2022


필리핀으로 출국하기    수영장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사실 방송일을 시작한  6 만에 처음으로 공동 샤워실에 들어갔다. 지인들끼리 여행 가서 우리끼리만 같이 사용한 적은 있지만 정말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 나체로 드나드는 공간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나는 이미  많이 세상과 나만의 공간에 벽을 세웠었나 보다.


원래 소수의 사람을 깊게 사귀는 성격인 나는 지금도 새로운 만남을 그저 편하고 즐겁게 느끼진 못하는 사람이지만 다이빙을 하면서 낯선 사람을 처음 대하는 나의 태도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스쿠버다이빙은 내가 살고 있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나를 안내해주었지만 어쩌면 내가 살고 있던 이 세상에 내가 세워두었던 높은 벽도 조금 더 낮춰준 것 같다.      

나는 물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무언가를 새로 배울  초중급 단계까지는 남들보단 조금 빨리 배우는 편이어서 스쿠버다이빙 교육은 즐거웠다. 나를 안타깝게 보고 걱정하는 위로보다는 무언가를 잘한다는 칭찬이 필요했던 시기였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서 하나씩  과제를 이루어가는  성취감이 나에겐 새로운 에너지가 되었다.      


나는 바닷속에서 때때로 강사님이나 동료들과 수신호로  필요한 의사 전달을 나누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 조용히 나의 호흡에 집중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지만 침묵하는 것이 당연한 편안한 권리를 누리며 나를 살펴볼  있도록 만들어준  세계에 젖어 들었다.


Bubble World. 2021


나는  숲을 보기보단  발자국 앞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노력해서 결과를 얻고  그다음 목표를 세우는 삶에 의미를 두던 사람이었는데 방송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일에 어떤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어려웠다. 선택받아야만 일할  있는데 선택받기 위해   있는 노력이나 행동에 특별히 정해진 길이 없는  같았고, 소문과 오해 속에 무기력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없는 거절  선택된 기회에서 원하던 만큼의 결과를 얻을  없었을  밀려오는 상실감을 나는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고 쌓아왔던  같다.   

   

바다는 내게 갑자기 계획 없이 나타난  같았지만 어쩌면 정말 필요한 시기에 나타나 커다란 치유로 나와의 관계를 시작했다. 다이버로서의 나는 노력하는 만큼 성장할  있고 열심히 하면 그만큼 빨리 성취할  있는 삶을   있음에 에너지를 많이 얻었다.


나는 건장한 남성 다이버들에 비하면 키도 작고 힘도 부족해서 무거운 장비를 들기도 어렵고 장비가 몸에  맞는 느낌도 아니었다. 몸을 사용하는 센스가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상급 과정으로 갈수록 남들보다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원할  훈련할  있었고 배울  있었고 상위 단계로 올라갈  있는 테스트를 언제 받을지 계획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 나를 숨쉬게 했다.      


초보 다이버 시절, 나는 일주일에 2-3번씩 수영장에 가서 훈련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다이빙을 대하는 내가 아직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바다랑   특별한 관계라고 얘기하지 못해 조바심이 났던  같다. 스쿠버다이빙과 바다에 대한  사랑을 공표하고 우리의 관계가 더욱 특별하다고 증명하는 방법은 강사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나지만, 나는 학생을 가르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 바다랑 친해요 말하고 싶어서 강사 타이틀이 갖고 싶었던 것을 인정한다.      


강사가된 후, 처음으로 바다에 다이빙 신생아들 데려온 날. 2015


강사가 되고 보니 내가 받은 만큼 무언가를 바다에게 돌려주기 위한 길을 만드는 과정은 아직도 멀고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지만, 강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훈련하고 자격을 갖춘 건 참 잘했단 생각이 든다. 배우는 처지에서 대상을 바라볼 때와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대상을 대할 때는 정말 많은 차이가 있고 참 신기하게도 강사 교육을 마치고 나니 나는 당장이라도 학생을 가르치고 싶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11 전으로 시간을 돌려 드라마에서 원래 주어졌던 주연으로서 드라마를 하고 다이빙을 시작하지 않는 , VS 지금과 같이 흘러온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지금의 삶을 선택하겠다. 그때 드라마를 주연배우로서  끝내고 그게  좋은 역할의 다음 작품으로 이어져서 보다 넉넉하고 편안한 시기에 스쿠버다이빙을 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건 만약에를 좋아하는 INFP 내 성격 유형 덕분에 스스로가 만든 질문이었다. 현실에 일어나지 않을 만약에를 묻고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INFP의 특징이다.)

질문의 대답은 명확하다. 그때 그 시기에 결핍의 마음일 때 다이빙을 시작했기 때문에 바다는 지금 나를 채우고 있는 이 소중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 소중함이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때 그일은 그렇게 흘러갔어야 한다.      


치유와 보호, 도전과 성취, 사랑이 있는 세계. 죽어가던 내 영혼에 심폐소생을 해준 나의 또 다른 세계. 받은 것이 너무도 많아 앞으로 정말 많은 것을 돌려주고 싶은 바다. 11년이 지나서야 내가 그때 그렇게 다이빙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오롯이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제일 다이빙을 가르치고 싶었던 우리 레오는 내 다이빙 그림의 항상주인공이었다. mixed art, 2017


10 때는 내가 마흔 살이 되면 아주 넉넉하고 여유롭게 평화로운 일상을 지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마흔이 되고 보니 나는 아직도 두려운  많고 위로가 필요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어른 아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서  가지 알게  것이 있다면 어떤 일은  그래야 했는지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후에야 이유를 알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많이 다친 만큼 멋진 일이 벌어질 거란 기대를 하면서 상처를 치유해보려는 기특함도 가끔 발휘한다. 곁에서 그런 나를 대견하다고 말해주는 완전한  편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혹시 지금 귀한 당신을 작아지게 만드는 일과 사람들로 지쳐있다면, 지금 현실이 괴롭다면, 계획 없이 찾아올 좋은 인연의 전조증상일 거라고 스스로에게 위로해줄 수 있을까.

일희일비하고  한마디에 크게 상처받고 스스로 위로가  안되는  같은 당신이라면 오늘은 내가 대신 위로해주고 싶다.


세상엔  이런 일이 내게 벌어졌는지  이유를 때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 그래도 지금 걷고 있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당신에게 수고했다고  안아줄 따뜻한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어보면 어떨까.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발짝 걸음을 내딛는  힘들더라도 터널의 끝은 빛을 품고 열려 있을거라고.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터널을 건널만 했다고 말할  있는 계획에 없던 소중한 존재가 시간의 저편에 있다는  나는 믿어볼래.       

당신이 있어서 좋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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