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를 쏘아올리는 추진체, 서드 스테이지
게를 똑바로 걸어가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 아리스토파네스 <평화>中
영문을 모른 채 추락하던 3D 프린팅 마켓, 에이드의 멤버들은 이제 그럭저럭 실패의 원인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2년의 악수 끝에 잔고는 다 떨어져버렸고, 추가 투자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시작, 운영, 그리고 실패를 인정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요인을 제대로 곱씹어 본 저와 친구들은 ‘내가 좋아하면서도 잘 알고 있는 것’을 구현해보고 욕망이 커진 상태였습니다. 누군가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알 수 없는 아이디어를 무작위로 모아놓은 3D 프린팅 마켓의 허구성에 질려버린 것도 있고, 원래가 일러스트레이터나 게임 기획자 같은 제작자를 지망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죠.
생각해보면, 저는 항상 다른 창작자들을 위한 플랫폼 운영을 목표로 했음에도 '서비스'보다는 '제작'에 대한 욕심이 컸던 것 같았습니다. 왠지 그동안 3D 프린팅을 서비스하면서 봐 뒀던 아이디어들을 펀딩을 통해 직접 만들고 대중화시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것보다는 잘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달까요?
3D 프린팅을 진짜 상품으로 만들어 팔겠다는 헛된 고집만 벗어 던진다면, 정지해 둔 기존 프로젝트에서도 장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독특한 아이디어와 모델링들을 3D 시제품 단계에서 멈춰두고, 트렌드에 맞게다듬어 기획한다면?
그리고 그 '아이디어 상품'을 자체 플랫폼이 아닌 널리 공개된 크라우드 펀딩이나 게시판에서 주목을 받아 모금한다면?
그러면서 크리에이터에게 아이디어와 원작에 대한 로열티를 제공하며 제대로 된 퀄리티의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한다면!
기존의 로망과 개인적인 희망을 함께 이룰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저희는 프로젝트 종료가 아닌 전환(피봇)을 위한 기획서를 꺼내들게 됩니다.
한 번만 더, 마지막 기회를 주시죠.
마지막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훨씬 간략해진 새로운 5페이지 짜리 기획안의 내용은 3D프린팅의 구현력과 신규성으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오타쿠적 요소를 대중적인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상품 제조기획사로의 새 방향성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반신반의하던 경영진도 프로젝트의 전환에 수긍해 주면서, 폐쇄를 앞둔 3D 프린팅 사업팀은 서드 스테이지THIRD STAGE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2016년의 마지막 6개월 동안 그 불씨를 살리게 되었습니다.
한결 단순해진 저희의 목적은 저희가 가진 3D 프린팅용 모델링 중 상품기획과 마케팅을 진행할 제품을 선정하고, 이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데뷔시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걸 많이, 많이 팔아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예전 회사명보다 약간 길어진 명칭, 서드 스테이지는 당시 감명 깊게 읽었던 마스다 무네아키의 지적자본론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영감을 얻은 것과는 별개로, 저는 로켓의 마지막 추진체(Third Stage)처럼, 창작자의 아이디어(Creativity)라는 위성을 시장(Market)이라는 본 궤도로 올려보낸다는 우리 만의 의미를 첨가시켰습니다. 지금 보니 제게 있어 창업, 실패, 재시작이라는 세 번째 단계로서의 중의적인 의미도 실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돌아보면 최초의 3D프린팅 마켓 플레이스를 만들겠다는 두루뭉실한 목표 대신, 내가 갖고 싶은, 남도 갖고 싶은 재미있는 물건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모토로 돌아간 건 옳은 방향성이었습니다.
큰 틀을 운영해야 했던 에이드의 프로젝트 매니저(PM)보다 내가 갖고싶은, 재미있는 물건을 기획하는 제작자(Maker)의 역할은 주니어에 불과했던 저희들에게 있어 훨씬 쉬운 목표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비록 없어져버린 첫 시도였지만, 우리에게는 3D프린팅 관련 일을 벌이며 얻은 꽤 특이하고 기상천외한 모델링들과 작가, 디자이너들의 연락처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이, 어떠한 실패도 경험과 여력을 남긴다는 걸 알게 되었죠.
정말 그랬습니다.
3D 프린팅 스토어를 폐쇄하고, 서드 스테이지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서 바로 변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렇게 북마크에 남아 있던 웹 사이트들을 서핑하던 몇 개월 만에, 저희에게는 정말 중요한 모델링 4점을 발견하게 되었거든요.
‘오, 그럼 이거 그냥 만들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