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단계에 도착했을 때

아이디어를 쏘아올리는 추진체, 서드 스테이지

by 이윤원





게를 똑바로 걸어가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 아리스토파네스 <평화>中



영문을 모른 채 추락하던 3D 프린팅 마켓, 에이드의 멤버들은 이제 그럭저럭 실패의 원인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2년의 악수 끝에 잔고는 다 떨어져버렸고, 추가 투자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시작, 운영, 그리고 실패를 인정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요인을 제대로 곱씹어 본 저와 친구들은 ‘내가 좋아하면서도 잘 알고 있는 것’을 구현해보고 욕망이 커진 상태였습니다. 누군가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알 수 없는 아이디어를 무작위로 모아놓은 3D 프린팅 마켓의 허구성에 질려버린 것도 있고, 원래가 일러스트레이터나 게임 기획자 같은 제작자를 지망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죠.



2015-09-07 16;08;40.png 3D 프린팅 마켓의 현실. '3초'는 신기하지만, '결국 구매하고 싶지는 않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Kabuku. Inc


생각해보면, 저는 항상 다른 창작자들을 위한 플랫폼 운영을 목표로 했음에도 '서비스'보다는 '제작'에 대한 욕심이 컸던 것 같았습니다. 왠지 그동안 3D 프린팅을 서비스하면서 봐 뒀던 아이디어들을 펀딩을 통해 직접 만들고 대중화시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것보다는 잘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달까요?





3D 프린팅을 진짜 상품으로 만들어 팔겠다는 헛된 고집만 벗어 던진다면, 정지해 둔 기존 프로젝트에서도 장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독특한 아이디어와 모델링들을 3D 시제품 단계에서 멈춰두고, 트렌드에 맞게다듬어 기획한다면?

그리고 그 '아이디어 상품'을 자체 플랫폼이 아닌 널리 공개된 크라우드 펀딩이나 게시판에서 주목을 받아 모금한다면?

그러면서 크리에이터에게 아이디어와 원작에 대한 로열티를 제공하며 제대로 된 퀄리티의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한다면!


기존의 로망과 개인적인 희망을 함께 이룰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저희는 프로젝트 종료가 아닌 전환(피봇)을 위한 기획서를 꺼내들게 됩니다.




한 번만 더, 마지막 기회를 주시죠.
마지막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훨씬 간략해진 새로운 5페이지 짜리 기획안의 내용은 3D프린팅의 구현력과 신규성으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오타쿠적 요소를 대중적인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상품 제조기획사로의 새 방향성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반신반의하던 경영진도 프로젝트의 전환에 수긍해 주면서, 폐쇄를 앞둔 3D 프린팅 사업팀은 서드 스테이지THIRD STAGE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2016년의 마지막 6개월 동안 그 불씨를 살리게 되었습니다.

한결 단순해진 저희의 목적은 저희가 가진 3D 프린팅용 모델링 중 상품기획과 마케팅을 진행할 제품을 선정하고, 이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데뷔시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걸 많이, 많이 팔아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3D 프린팅 스토어의 단점을 보완해 메이커들의 상품을 기획하겠다는 방향성으로 전환했습니다. ©THIRDSTAGE.



예전 회사명보다 약간 길어진 명칭, 서드 스테이지는 당시 감명 깊게 읽었던 마스다 무네아키의 지적자본론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영감을 얻은 것과는 별개로, 저는 로켓의 마지막 추진체(Third Stage)처럼, 창작자의 아이디어(Creativity)라는 위성을 시장(Market)이라는 본 궤도로 올려보낸다는 우리 만의 의미를 첨가시켰습니다. 지금 보니 제게 있어 창업, 실패, 재시작이라는 세 번째 단계로서의 중의적인 의미도 실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09753684(2).jpg 많은 영감을 준 책 중 하나인 마스다 무네아키의 지적자본론.






돌아보면 최초의 3D프린팅 마켓 플레이스를 만들겠다는 두루뭉실한 목표 대신, 내가 갖고 싶은, 남도 갖고 싶은 재미있는 물건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모토로 돌아간 건 옳은 방향성이었습니다.


큰 틀을 운영해야 했던 에이드의 프로젝트 매니저(PM)보다 내가 갖고싶은, 재미있는 물건을 기획하는 제작자(Maker)의 역할은 주니어에 불과했던 저희들에게 있어 훨씬 쉬운 목표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비록 없어져버린 첫 시도였지만, 우리에게는 3D프린팅 관련 일을 벌이며 얻은 꽤 특이하고 기상천외한 모델링들과 작가, 디자이너들의 연락처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이, 어떠한 실패도 경험과 여력을 남긴다는 걸 알게 되었죠.


12804658_199622173732686_5043106758352508375_n.jpg 아무리 늙고 보잘 것 없는 호랑이도 가죽 1장은 남깁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3D 프린팅 스토어를 폐쇄하고, 서드 스테이지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서 바로 변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렇게 북마크에 남아 있던 웹 사이트들을 서핑하던 몇 개월 만에, 저희에게는 정말 중요한 모델링 4점을 발견하게 되었거든요.



‘오, 그럼 이거 그냥 만들어볼까요?’


단체샷_1_.jpg 개새 피규어 시즌1 ©THIRDS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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