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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순 Dec 03. 2023

엄마의 편식

프렌치어니언수프


연말에는 왠지 프렌치가 땡긴다. 평소 같으면 다소 오버스럽게 느껴질 법한 특유의 무드가 이 시기만큼은 무난하게 잘 녹아들어 그런가. 얼마 남지 않은 올해에 뭔가 꾸역꾸역 이벤트를 밀어 넣고 싶어 평소와는 다른 식사가 하고 싶어지는 거려나. 암튼, 가벼운 비스트로든 격식차린 레스토랑이든 어디든 칼질 좀 하며, 와인 잔 부딪히러 자꾸만 가고 싶어 진다.

프렌치 식당에 가면 시키는 메뉴는 그때그때 다르지만,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챙겨 주문하는 음식이 있다. 작은 단지 속 토실토실 풍선껌 같은 모차렐라 치즈와 함께 오래오래 끓여 낸. 덕분에 달큰한 감칠맛 잔뜩 우러나, 몸속 깊은 곳부터 온기를 퍼져나가게 하는 프렌치어니언수프가 바로 그것이다.


몇 년 전, 엄마랑 단둘이 파리 여행을 간 적이 있다. 호텔 앞 비스트로에서 메뉴판을 구경하고 있을 때 분명, 엄마는 프렌치어니언수프를 싫어한다고 했다. 굳이 별로 먹고 싶지 않다고 하니, 그럼 나만 먹겠다고 한 개 만 주문했다. 초겨울의 파리는 한파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쌀쌀했고, 모락모락 김을 피우며 등장한 어니언수프의 비주얼은 내가 봐도 꽤나 매혹적이었다. 결국 유혹에 못 이기고 한 입만 먹어보겠다던 엄마는 '어머, 나 이거 좋아해'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접시를 당신 앞으로 가져가 한 그릇을 싹싹 비워내고야 말았다.


엄마와 파리에서 먹었던 프렌치어니언수프


프렌치어니언수프는 사실상 호불호가 갈릴 것도 별로 없는 음식이다. 양파의 아삭거리는 식감, 아린 맛을 싫어하는 사람일지언정, 이 부드러운 단 맛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지만, 버터와 치킨스톡으로 감칠맛을 탄탄히 다져두었다. 심지어 치즈까지 도탑게 올라가는데, 또 느끼하지 않고 묘하게 개운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한국인 사랑해 마지않는 뜨끈한 국물 음식이기까지 한데, 어찌 미워할 수 있으랴.

아마 엄마는 제대로 프렌치어니언수프를 먹어보는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기회가 없었다기보다는, 굳이 새로운 음식에 선뜻 용기 낸 적이 없었을 것이고, 내가 시킨 수프 한 그릇은 엄마에게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경험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세상을 열어 준 것이 엄마인데, 그런 엄마의 세상을 이제는 내가 열어주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촘촘히 올라간 그뤼에르 치즈가 맛있었던 프렌치어니언수프


오랜만에 서울에서 먹은 어니언수프는 역시나 달고 따뜻했다. 파리에서 먹었던 것 보다 오히려 더 섬세하게 담아내 진 한 그릇이었다. 굳이  멀리 프랑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렇게 맛있는 수프를  진작 맛 볼 수 있는 거였는데, 진작 엄마의 편식을 내가 고쳐 줄 걸 그랬다.


다음엔 엄마가 싫다고 했던 장어덮밥을 함께 먹으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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