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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순 Nov 19. 2023

도톰도톰, 겨울 맛

방어회와 굴보쌈


이름에 눈 雪자가 들어가서 그런가. 겨울을 좋아한다. 정신이 또렷하게 드는 맑고 차가운 공기도, 두툼한 옷 안쪽으로 스미는 뭉근한 온기도, 일찍 찾아오는 어둠 덕에 더 반짝반짝 밝게 빛나는 거리들도.

그리고 한 가지 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유독 이 계절에 오동통, 탐스럽게 살이 오르는 겨울의 맛들. 그중에서도 특히 매끄덩하게 기름진 고소함이 한 껏 여무는 겨울 해산물은 더더군다나 포기할 수 없다.

유독 따뜻했던 가을 끝, 하루아침에 차가워진 겨울바람을 쐬니 안달복달 마음이 조급해졌다. 방어와 굴보쌈을 먹어야겠다. 어느 하나 순서를 양보할 수 없지. 김 위에 묵은지, 무순과 함께 두툼한 방어 착착 올려먹다가, 그 기름진 맛이 물릴 때 즈음 입안 가득 개운하게 굴로 싹 재정비. 그리고는 맵싹 하게 무친 겉절이와 야들야들 수육까지 한입에 넣는 플로우. 이 두 가지를 함께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압구정 모 해산물주점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안내를 받고 자리로 향하는 동안 다른 손님들의 테이블 위를 둘러보니,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니었나 보다. 그다지 크지 않은 네모 밥상 위 빼곡히 선연한 빨간빛 윤기 나는 생선회와, 접시가 버거워 보이도록 듬뿍 쌓아 올린 굴보쌈 사합이 올라찼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지. 이제는 익숙한 테이블 위 태블릿으로 능숙히 주문.

방어회. 겨울 초입이지만 기름이 제법 올랐다.


역시, 겨울 방어는 참 예쁘다. 참치와는 또 다른 분홍-빨강 사이의 빛깔도 곱고, 한 점 한 점 곱게 수놓아진 결도 섬세하다. 아직 때가 이를까 고민을 했는데, 반질반질하니 표면에 맴도는 윤기를 보니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로 기름이 잘 올라보였다.

일단 방어 한 점 그대로 한 입. 곧이어 김 한 장 깔고 초대리밥과 묵은지, 고추냉이까지 콕 올려 한 입. 매끈하게 녹는 고소함과 탱탱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식감. 겨울 추위 매서운 바람에도 몸 허하지 말라고 기름지고 탱글지게 입안을 가득 메워준다. 그 녹진함을 이내 차갑고 투명한 소주 한 잔으로 쓰윽 내려주면 쨍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문어숙회를 곁들인 굴보쌈 한 대접.


한참을 방어에 정신 팔려 있자니, 잊지 말라는 듯이 굴보쌈이 나왔다. 접시 위 그득 올려진 돼지고기 수육과 겉절이, 굴과 문어숙회까지.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설렘에 발을 동동 구르게 되지만, 역시 첫 입은 굴 하나 집어 초장에 푹 찍어 맛보기. 오이스터바에서 먹는 큼직한 삼배체 굴에 비하면 작고 앙증맞은 사이즈지만, 한입에 매끄럽게 들어와 초장 맛과 어우러지는 쥬시함은 익숙하게 짜릿하다.

달큰한 알배추에 부드러우면서도 차지게 삶아진 문어와 껍질 부분까지 쫀득한 수육. 각자 밀도 높은 맛을 시원하게 아울러 주는 굴, 그리고 맵싹 하니 개운한 겉절이로 라스트펀치. 이 밸런스는 굴을 먹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생각 못한 위대한 발견이 아닐까. 여유 공간 없이 입 안을 터뜨릴세라 메우면서 각 재료가 온갖 맛을 다 주장하며 빚어내는 시너지. 그 풍성함은 곧 이 계절에만 맛볼 수 있다는 희소성까지 한 겹 덧입고 더 영롱히 빛을 발한다.



분명 얼마 전까지 푸근했던 날씨가 하루아침에 매서워지니, 아무리 겨울 아이라 할지언정 조금 겁이 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계절의 초입, 이 계절의 맛으로 든든하게 기름칠해 두었으니, 올 겨울도 잘 지나 보낼 수 있을 것 만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난다.

올해 겨울도 양껏 추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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