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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순 Nov 27. 2023

식물성 보양식

양배추 스테이크



요 몇 달, 나를 시달리게 하던 프로젝트들이 모두 끝났다. 올해는 유독 많은 프로젝트가 한꺼번에 겹쳐, 정신없는 나날들이었다. 어느덧 나이와 연차는 차곡차곡 쌓여 가, 그저 선배 등짝만 보고 쫓아가면 되는 막내 실무자가 아닌 앞으로도 달리고 뒤로도 달려야 하는 중간 관리자가 되어버린 터에 더 버거웠다. 내 할 일 챙겨하기도 바쁜데, 한 번씩 멈춰서  일정 내에서 일을 분배하고, 진행상황을 체크하고 피드백을 주고. 그다음은 더 힘들다. 피드백이 제대로 반영이 되었는지를 체크하고 마무리를 해하는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정말 계획대로 풀린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 좀 숨이 돌려지기 시작하자, 그동안 누적되었던 온갖 피로와 스트레스는 내 정신보다도 몸에 뚜렷한 증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워낙 둔감해서 그런가, 아님 깊이 생각할 틈이 별로 없었어서 그런가, 마음적으로는 꽤 할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하긴, 씻으면서도 숫자를 계산하고, 자면서도 보고장표를 그리며 살았으니. 한 10cm 정도 길이의 키 작은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시도때도 없이 눈밑이 떨리는 증상은 근 한 달째 나아지지를 않고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들이 마감을 맞이하였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축하하고 나 자신의 노고를 치하하며, 일단 하루 연차를 냈다. 딱히 뭘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응당 찾아오는 주말 말고, 추가로 하루 정도의 휴일을 가지고 싶었다. 주말은 또 주말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다소 돌발적인 변칙이 요구되는 법이다.

알람 없이 느긋이 일어나는 평일의 아침은 꽤나 짜릿했다. 남편은 이미 출근한 후였고, 집안은 고요했다. 가볍게 운동을 하고 집에 있는 음식들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나니 막상 할 게 없다. 결국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한참 전 읽다가 호흡이 끊겨버린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늘 가보고 싶었단 바로 향했다. 그냥 단순히 바라고 하기엔 뭐 하고, 문학살롱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술이나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자유롭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싶은 이들이 모여드는 공간이랬다.

처음 와 본 어리숙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짐짓 여유로운 척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 전 읽다 끊긴 SF소설을 읽고 있다 보니 금방 배가 고파왔다. 이곳은 간단한 식사 거리도 팔고 있었다. 부라타치즈샐러드도 마음이 가지만, 으슬으슬  추운 날씨라 보다 온기가 도는 음식이 필요했다. 한참의 고민 끝에, 알배추스테이크를 주문해 보기로 했다.


알배추스테이크. 당근 퓌레와 고사리 소스가 곁들여진다.


속이 노오란 알배추는 흐드러진 꽃잎처럼 제 이파리를 접시 위에 양껏 펼치고 있었고, 그 양 옆으로 당근 퓌레와, 고사리 칠리, 두 가지 소스가 곁들여져 나왔다. 서로 다른 소스 간의 색깔의 대비가 곱고, 피어올라오는 버터의 향이 향긋했다. 잘 여문 심지 쪽을 나이프로 스윽 썰어보니, 야들야들한 끝 부분까지 한 잎이 오롯이 분리된다. 소스를 양껏 휘감아 입에 넣어보면, 뭉근한 당근 퓌레와 배추 자체에 사는 단 맛, 텁텁하지 않게 입안에서 기분 좋게 퍼지는 수분감, 그 위를 베일처럼 아우르는 버터의 풍미에 온몸이 사르륵 녹는 기분이다.

접시 양 극단을 점유하고 있는 두 가지 소스는 서로 등을 맞댄 채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당근 퓌레의 부드러움이 지루해질 때쯤 고사리 칠리소스로 갈아타보면, 고소함 속에 톡톡 튀는 스파이스가 얇고 부드러운 배춧잎 사이사이 스며들며 재미를 준다. 그렇게 한참을 먹다 보면 어느새 두 세계관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알배추의 몸집이 한 껏 작아져 이윽고 두 소스가 만나는 지점이 오게 되는데, 단 맛 사이사이 스미는 약간의 매운맛의 시너지로 적절한 피날레를 이룬다.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나니 문득 꽤나 긴 시간 동안 눈 밑이 거의 떨리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확실치는 않지만 왠지 그런 것 같다. 철분에 마그네슘 영양제, 칼륨이 풍부하다는 바나나에 몸보신 한우까지 다 먹어보아도 쉽게 낫지를 않던 증상이었는데, 의외로 특효약은 알배추였나 보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한껏 편안해진 마음을 여린 이파리와, 단단한 심지로 함께 어루어만져준 것이 제대로 들어먹지 않았나 싶다.

함께 시킨 올드패션드 한 잔도 말끔히 비우고 나서, 집에 갈 채비를 시작했다. 그 새 해가 지고 기온이 부쩍 내려가 있었지만,  내가 일에 몰두하고 있던 시간 동안 결구를 맺고 잘 영근 알배추, 그리고 약간의 버번위스키가 선사해 준 온기가 부적처럼 온몸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날 밤, 아주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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