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이 글은 뉴질랜드 교민지 '뉴질랜드 타임즈'에 실린 글입니다.)
얼마 전에 평소 가까이 알고 지내던 선배님 부부에게 점심 초대를 받았다. 우리 부부보다 한참 연배가 위인 분들이지만 상당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만나면 이야기가 통했고 편하게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남자끼리도 여자끼리도 형님 아우 언니 동생 하면서 격식 없이 자주 만나 가깝게 지내는 분들이었다. 서로 간에 식사 초대를 자주 해왔지만 그래도 혹시 특별한 일이 있나 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여쭈었지만 아니 그냥 만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하시기에 우리 부부는 가벼운 마음으로 초대에 응하였다. 하지만 식사 장소가 평소와는 달리 시내 호텔의 꽤나 괜찮은 레스토랑이라는 것을 안 뒤에는 분명 무언가 좋은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예약장소로 나갔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지만 두 분은 벌써 오셔서 기다리다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인사를 나누고 주문을 한 뒤 음식이 나오기 기다리는 동안 선배님이 말문을 여셨다. 얼마 전 운전면허가 만기가 된다는 통지를 받고 면허를 갱신하려 했더니 팔십 세부터는 의사에게 건강진단을 받아 이상이 없다는 증명서를 첨부해야 한다고 했다. 그제서야 선배님은 아 내가 이제 팔십이 되었구나 하는 사실을 실감하셨다. 건강진단을 받고 운전면허를 갱신했지만 유효기간이 2년밖에 안 되었고 2년 뒤에는 다시 운전면허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머릿속에서 만감이 교차하였다고 하셨다.
일흔아홉에서 팔십이 되었다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별안간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팔십이라는 나이가 운전면허 갱신을 통해서 확연하게 현실로 다가오자 이제껏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가시기를 이제까지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겠다고 하셨다. 무슨 말씀이냐고 아직 사실 날이 많이 남아있다고 하는 우리 부부의 말에 고맙다고 하시며 그러나 사실은 사실로 받아들이고 다가오는 죽음을 무서워하거나 피하려 들지 말고 들여다보며 살면 남은 삶이 훨씬 평안해질 것이라고 하셨다.
뉴질랜드에서는 운전면허 갱신이 본인의 생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선배님도 생일이 가까워져서 면허 갱신 통보를 받았고 바로 오늘이 팔십 회 생신이라고 하셨다. 운전면허 갱신을 통해서 팔십의 나이를 실감하며 지난 삶을 돌아볼 좋은 기회가 되었던 선배님은 앞으로는 더욱 베풀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나눔과 베풂을 실천해 오시는 두 분의 생활을 잘 알기에 ‘이제까지도 잘 해오셨는데요,’라고 하자 ‘더 해야지요, 시간이 있을 때,’ 하면서 담담히 웃으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여태껏은 생일에 대부분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어먹었는데 이번 팔십 회 생일부터는 다른 사람에게 식사를 대접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하셨다. 생일부터 베풀어야 마음의 자세가 더욱 바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누구와 같이 팔십 회 생일을 같이 할까 생각하다가 제일 마음에 짚이는 부부가 우리 부부였다고 하셨다. 선배님이 말씀을 잇는 동안 부인께서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면서 가끔씩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셨다. 우리 부부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그마한 감동이 계속 물결치듯 가슴속으로 밀려왔다. 과연 우리가 이런 훌륭한 선배님의 뜻깊은 팔십 회 생신에 초대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부끄러움과 더불어 팔십을 맞으시는 선배님의 아름답고 넉넉한 삶의 자세가 부러움으로 밀려왔다. 선배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문득 작년 가을 통영에 갔다가 들린 박경리 기념관에서 샀던 선생의 유고시집 중 ‘옛날의 그 집’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생전에 박경리 선생을 만나진 못 했어도 선생의 시(詩)를 통해 그 넉넉한 삶의 품격을 느꼈는데 오늘 선배님 부부를 통해 노년의 넉넉한 삶을 직접 체득하게 되니 여간 감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한’ 그 삶의 경지에 왜 보통 사람들은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 그 경지에만 이르면 노년의 삶이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이라고 영탄(永嘆)할 수 있을 텐데.
식사를 하면서 내가 박경리 선생 이야기를 하자 선배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아요. 나도 팔십이 되었다는 사실에 처음엔 내가 정말 늙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으니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었어요. 이제 팔십이 되었으니 지난 삶을 뒤돌아보고 다가올 죽음을 들여다보며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니 아주 홀가분해졌어요. 이제부터는 주변 정리도 하면서 마지막 순간에는 정말 버리고 갈 것만 남겨야 하겠지요,’하며 담담히 웃으셨다. 선배님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또 박경리 선생의 시(詩) ‘산다는 것’ 중에 나오는 한 구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혈압약 먹는 것이 왜 민망하고 부끄러웠을까? 팔십이 가까워진 그때에 선생께서는 이미 죽음을 들여다보고 계셨기에 그런 감정을 느끼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죽음을 피하려 들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결코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선생이 민망하고 부끄럽게 느끼면서도 혈압 약을 먹은 것은 죽음을 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사는 날까지 불편하지 않게 살면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으려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했다.
예전에는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 七十 古來稀)라고 해서 칠십까지 사는 것도 참 드문 일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의 수명이 늘어난 요즈음은 팔십까지 사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팔십까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고 감사한 일이다. 더구나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이다. 수명연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떻게 사느냐일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삶의 어느 시점에 도달했을 때엔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고 또 다가오는 죽음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아 참으로 중요할 것이다.
‘전에는 전도서 3장의 성경 구절이 그렇게 공감이 안 갔지요, 그런데 이제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져요,’ 하면서 식사가 끝날 때쯤 선배님이 독실한 기독교인답게 말씀을 이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모두가 창조주의 섭리인데 부르시면 가야 하고 가기 전엔 버릴 수 있을 만큼 버려야겠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선배님의 표정엔 팔십의 연륜이 순리(順理)의 나이테처럼 잔잔하게 배어 나왔다.
우리 부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종업원이 다가와 따라주는 커피 내음이 유난히 향기로웠다.
선배님 부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얼마 전에 읽었던 책 ‘조화로운 삶’의 부부 저자인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의 탐욕으로 움직여 가며 남을 착취하여 얻은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부(富)를 쌓으려는 서구 문명’ 속에 남아있기를 거부한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 1883 – 1983)은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40대 중반에 만난 평생의 반려자 헬렌 니어링과 함께 시골로 가서 자급자족적인 삶을 영위하였다. 이들이 선택한 삶은 건강과 단순한 생활 그리고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나 조화롭게 살아갈 기회를 허락해 주었다. 이들의 삶 자체가 현대문명의 틈바구니에서 아귀다툼하듯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경이 그 자체이지만 더욱 감동스러운 것은 부인 헬렌이 들려주는 스코트의 마지막 순간이다.
‘100살이 되기 두어 달 전에 남편은 이제 됐어. 이제 그만 가야 되겠어 라고 말했어요. 그때부터 남편은 식사를 중단했고 한 달 반 동안 액체만 마시다가 마지막에는 물만 마시고 갔어요. 괴로움도 없었고 통증도 없었고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남편이 숨을 거둘 때 저는 같이 있었어요. 그리고 격려해드렸어요. 가세요. 해치우세요. 당신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요. 가서 저쪽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세요 라고 말했어요.’
삶은 창조주가 우리에게 내린 선물이다. 그 삶을 영위하고 꾸려나가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또한 의무이다. 짧든 길든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며 감사하고 때가 되면 다가오는 죽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짐승과는 다른 목숨을 갖고 태어난 우리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삶은 지나가는 것이다. 누구든 늙고 누구든 때가 되면 가야 한다. 때가 되었을 때 스코트처럼 ‘이제 됐어. 이제 그만 가야 되겠어’라고 말을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도 그의 부인 헬렌도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니 다가오는 죽음을 흥미롭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떠나가는 남편에게 ‘가서 저쪽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 부부에게 죽음은 삶의 연장이었다. 이 땅에서의 삶보다 오히려 더 신명 나는 무엇이 있는 또 다른 삶으로 죽음을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그렇게 자신 있는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도 그들처럼 살 수 있고 그들처럼 떠날 수 있다. 노년의 친구들이여!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뒤돌아보자.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을 기대에 찬 마음으로 들여다보자. 남은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이다.
2019. 11월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