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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Dec 08. 2023

이 겨울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젊은 날의 회상

이 겨울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이 겨울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내 가슴의 한 귀퉁이는

벌써 내려앉는다


내려앉은 내 가슴 한 귀퉁이로 

부우연 안개가 넘나들고

안개 사이로 아스라이 얼굴 내미는 안타까운 정경들


어린 날의 학교 운동장

마음껏 뛰놀다 벌렁 바닥에 누우면

푸른 하늘 떠가던 흰 구름


할머니 돌아가신 저녁

친구들과 놀다 돌아온 

집 대문 앞에 매달려 떨고 있던 조등(弔燈)


진달래 화사하게 피어나던 교정

까르르 웃으며 

꽃보다 환한 웃음 터뜨리던 여학생들의 얼굴


흰 구름도 사라지고

다정했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여학생들의 얼굴도 모두 흩어져버린 이 겨울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바람보다 먼저 빗방울보다 먼저

축축한 추억만 내 가슴에 내려앉는다


그 겨울엔 비가 많이 내렸다. 날씨는 춥지 않았지만 흐린 날이 많았고 을씨년스러운 바람과 더불어 비가 자주 오는 겨울이었다. 


12월이 되고 떨어져 구르던 낙엽이 무리무리 흩어져있는 교정에 뚝뚝 떨어지는 겨울 빗방울은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거의 모든 강의가 끝이 났고 우리들은 졸업 논문을 마치기 위하여 도서관에서 그리고 학교 앞 다방에서 자주 만났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 전에 우리들은 졸업을 해야 했고 또 학교 문을 나가야 했다. 


시꺼먼 교복과 머리를 짓누르는 교모에서 벗어나 대학생의 자격으로 학교 문을 들어섰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4년이 지났고 우리들은 이제 학교 문을 나가 또다시 탈바꿈을 할 차례였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아래의 대학생활 동안 데모가 없었던 해가 없었지만 이제 우리들 남학생 모두는 싫든 좋든 모두가 그 군사독재를 뒷받침하고 있는 군대에 가야 했다. 4년 동안 모자를 벗고 자유로운 학창생활을 즐겼던 우리들의 머리 위에 이제는 교모가 아닌 군모가 덮여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논문준비라는 구실 아래 우리들은 모였었지만 우리들의 주된 화제는 군대라는 미지의 세계와 그 뒤로 펼쳐질 우리들의 장래에 관한 것이었다. 학사 장교로 간부후보생으로 혹은 그냥 사병으로 이미 입대 날짜가 정해져 있었지만 군대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다분히 부정적이었고 어떻게든 힘든 것을 참고 견뎌내 무사히 제대를 해야 한다고 우리들은 입을 모았다. 똥개가 짖어도 세월은 가기 마련이니까 우리 모두 잘 견디고 제대한 뒤에 다시 만나자고 하며 우리들 중 하나가 벌써 군인이 된 듯 군인스런 말을 하면 우리들 모두는 그냥 웃었다.


자 자 우리 대충 마치고 한잔 하자. 군대 가면 마실 수도 없어. 가기 전에 실컷 마시고 가야지 하며 누군가가 바람을 잡으면 우리들 모두는 그래 그러자 논문은 각자 집에 가서 쓰기로 하고 빨리 나가자 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바람이 불어도 차가운 겨울 빗방울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도 젊은 우리들은 상관치 않았다. 우리들은 그렇게 모였고 그렇게 마셨고 그렇게 울분을 토해냈고 마음껏 우리들의 미래를 그려냈다.


그렇게 그 겨울이 지나갔고 우리들 모두는 교문을 나가 각자 갈 길을 갔다.


비가 많이 내리고 바람이 많이 불었던 그 겨울이 지나간 지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건만 지금도 겨울이 되면 비가 내리면 바람이 불면 그 겨울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겨울이 못 견디도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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