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운 김동찬 Jan 11. 2024

기차 여행

궤도 위를 달리는 우리의 삶, 바르게 가고 있나?

홋카이도(北海道)에 대한 여행기


지난 4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아내와 같이 차를 마시면서 티브이에 나오는 여행 프로를 보았다. 마침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 대한 여행기였다. 온통 눈으로 덮여있는 홋카이도의 정경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사철 눈이 내리지 않는 도시에 살고 있기에 설경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우린 이구동성으로 너무 예쁘다 정말 깨끗하다 하고 감탄을 연발하다가 작년 12월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전주에서 맞았던 첫눈 이야기를 했다.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는 한옥마을의 거리를 마치 십 대의 소년 소녀처럼 들떠서 동동거리며 걸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눈 속을 달리는 기차, 정말 멋있네요, "하며 아내가 티브이 화면을 가리켰다. 순백의 설원(雪原)을 가로지르며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영화 철도원(鐵道員)의 촬영지인 이쿠토라 역(영화에서는 호로마이 역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곳)을 찾아가고 있다고 내레이터가 말했다. 


"우리도 언제 기차 타고 겨울 여행 한 번 해봐요, "하고 아내가 이미 기차를 타고 차창 밖의 눈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우리 당장 내일 기차 여행합시다, "라고 내가 맞장구를 쳤다. "내일요?"하고 아내가 의아스러운 표정을 할 때 "진짜 겨울 기차 여행은 이번 겨울에 한국 나갈 때 계획 잡아하고 내일은 꿩 대신 닭이라고 시내에 가서 기차 타고 푸케코헤(Pukekohe)까지 갔다 옵시다. 데본포트(Devonport)에서 배 타고 시내 가서 기차로 갈아타고 느긋하게 갔다 오면 그것도 멋있을 거요. 어때?"라고 내가 말하자 아내도 "아 그러면 좋겠네요. 내일 마침 시간도 있고. 좋아요, "라고 대답해서 우린 다음날 기차여행을 하기로 하고 소풍 전날 아이들처럼 들뜬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데본포트 선착장까지 걸어서 갔다. 그날 4월의 오클랜드(Auckland)의 가을 날씨는 청명하였고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있는 하늘은 푸르기만 했다. 이렇게 깨끗하고 평화로운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참으로 축복이라고 느껴졌다. 옆에서  걷는 아내의 발길도 무척 가벼워 보였다.


데본포트에서 시내로 가는 페리는 30분에 한 척씩 있었다. 배 타는 시간은 십오 분 정도인데 배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과 육지의 모습이 꽤나 아름다워서 어떤 때는 배 타는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날 아침 바다는 잔잔하였고 배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선실의 유리창 안으로 바다의 푸르름과 하늘의 푸르름이 가을 햇살과 더불어 같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름답고 평화로워요, "하고 아내가 창밖을 바라보면서 꿈꾸듯 속삭였다.

 

배에서 내려 브리토마트(Britomart) 역으로 가려고 길을 건넜다. 브리토마트 역 맞은편에 대형 쇼핑 몰을 짓느라고 교통이 통제되기에 앞으로 가지 못하고 옆 골목으로 돌아가야 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왼쪽에 있는 일본 라면 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 참. 이 집 제법 맛있다고 소문난 집에요. 우리 여기서 점심 먹을까요?"하고 아내가 말했다. "당신 어제저녁 티브이에 나왔던 홋카이도 라멘 집 생각났구먼, "하고 내가 말했더니 "맞아요, 어젯밤에 보면서 일본 라멘 맛있겠다 생각했는데 오늘 먹게 됐네요, "하면서 아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라면을 먹으면서 아내는 아주 옛날 대학시절에 처음 일본 갔을 때 들렸었던 시골의 작은 마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오래돼서 마을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거기서 삼 대째 내려오는 조그만 모찌 가게를 본 적이 있었다고 하면서 일본 사람들은 가업을 잘 지키는 미덕이 있다고 말했다. 아내의 대학시절이면 내가 아내를 만나기 전이었다. 옛이야기를 하는 아내의 모습 위로 그 옛날 청순하기 그지없었을 아내의 처녀 적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기차를 타고


점심을 끝낸 후 우리는 브리토마트 역으로 와서 파파쿠라(Papakura) 행 기차를 탔다. 푸케코헤를 가려면 파파쿠라에서 갈아타야 한다고 역무원이 알려줬다. 작년에 골드 카드(6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뉴질랜드 정부가 주는 카드. 배, 기차, 버스 등의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를 처음 받은 아내는 골드 카드로 기차는 처음 타 본다면서 활짝 웃었다. 평일 오전의 기차 안은 여유로웠고 우리는 앞자리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인구는 적고 인구에 비해 땅덩어리는 제법 넓은 뉴질랜드이기에 대중교통이 취약한 오클랜드에 몇 년 전부터 많지 않은 노선이지만 기차가  운행을 시작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처음 생겼을 때보다 요즈음은 이용객들도 많아졌고 노선 별 운행 빈도도 훨씬 잦아졌다고 얼마 전 뉴스에 나왔던 것이 기억났다.


우리가 탄 기차의 종점은 파파쿠라였다. 푸케코헤에 가기 위해서는 거기서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우리는 파파쿠라 역 종점에서 일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 푸케코헤 행 승강장으로 갔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기차를 기다렸다. 가을 하늘은 푸르렀고 높은 곳엔 제법 바람이 있는 듯 구름이 꽤나 빨리 이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오니까 너무 좋아요, "라고 말하며 조금은 추운 듯 아내가 몸을 기대 왔다. 아내의 낯익은 머리 향기가 가을바람에 실려 내 코를 스쳤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파파쿠라에서 푸케코헤까지는 한 정거장이었지만 꽤나 긴 거리여서 이십 분 정도 걸렸다. 하지만 기찻길 양 옆으로 푸른 들판과 나무로 뒤덮인 구릉들이 계속되기에 마치 한국의 시골길을 달리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아내도 나도 오클랜드 도심을 벗어나 한 시간도 안 돼서 이런 기차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행운이라고 입을 모았다. 국민학교 시절 이삼 년을 시골의 외할머니 댁에서 보냈던 아내는 항시 시골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기에 특히 이런 풍경을 마음속으로부터 좋아했다. "이럴 땐 외할머니 생각이 나요. 참 무척이나 저를 귀여워해 주셨고 해 달라는 건 다 해주셨는데요……"하며 말끝을 흐리는 아내의 눈길은 까마득한 옛날의 어느 정겨운 곳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 속에서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어리광을 부리는 어렸을 때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낯선 곳 어슬렁거리기


기차가 푸케코헤 역에 도착하자 우리는 내려서 도심을 향해 걸었다. 푸케코헤는 전에도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 오클랜드 교외의 마을 중에서는 가장 번화한 도심을 갖고 있었고 멋진 카페와 식당 그리고 옷 가게들이 나름대로 잘 어울려 있어 거리들이 예뻤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원예를 하는 사람들이 주민의 대부분이었지만 모두가 부농들이었기에 이렇게 멋진 도심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그냥 걸었다. 괜찮아 보이는 옷 가게도 들려보고 실내장식이 화려한 고급 소품 가구점도 들려보고 나는 아내의 발길을 따라 같이 걸었다. "뭐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요, "하고 내가 말하자 "이럴 땐 그냥 아이쇼핑이 재미있어요. 봐 놓았다가 나중에 정말 필요하면 그때 사고요. 오늘은 그냥 이렇게 다녀요."하고 아내는 환하게 웃었다.


한 이십 분쯤 이렇게 걸었을 때 왼쪽에 자그마한 쇼핑몰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그 입구에 아주 예뻐 보이는 카페가 있었다. "우리 저기 가서 커피 한잔해요. 다리 아파요, "하면서 아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도 좀 쉬고 싶은 생각이 들 때여서 즐겨 따라 들어갔다. 아내는 디카페 라테를 시켰고 나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리고 상큼해 보이는 케이크 한 조각을 덧붙여 시켰다. 창가의 자리에 마주 앉아 커피를 기다리며 우린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뭐 생각하고 웃으세요?"하고 아내가 물었다. 그렇게 묻는 아내의 모습에서 오늘 뜻밖의 나들이가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느낌이 살며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냥, 행복해서, "하며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래요, 저도 무척 행복해요. 행복이란 정말 삶의 작은 반전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배워요. 생각지도 않은 기차 여행이 이렇게 좋을지는 생각도 못했어요. 당신 정말 멋진 아이디어를 냈어요, " 하고 맞장구를 쳤다. 평소에 그리 말이 많지 않던 아내로서는 굉장히 말을 많이 한 것이었다. 그런 아내가 너무 보기 좋아 내가 말을 이었다. "나도 오늘 참 좋았소. 내가 젊었을 때부터 기차 타기 좋아하는 거 당신도 알잖우,”하면서 나는 군에 있을 때 휴가만 받으면 기차 타고 혼자 여행했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젊은 날의 추억


장교로 군 복무를 했던 나는 일 년에 두 번 장기휴가를 받으면 간단한 가방 하나 들고 전국을 여행했다. 아직 고속버스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대라 기차가 제일 편한 교통수단이던 때였다. 주머니에 장교 신분증 하나 품고 기차역으로 나가 종착역이 어디든 제일 먼저 탈 수 있는 기차를 집어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주머니는 가벼웠지만 젊음이 넘쳤던 그땐 가는 곳마다 흥미로웠고 만나는 풍물마다 신기하기만 했었다. 마음껏 돌아다니다 돈 떨어지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누굴 만나려고 그렇게 돌아다녔어요? 혹시 구석구석에 숨겨 논 여자라도 있었던 것 아녜요?"하고 아내가 방글방글 웃으며 물었다. "글쎄 말이오. 당신을 일찍 만났으면 그렇게 돌아다니지 않았을 텐데, "하고 나도 웃으며 답했다. 아내를 처음 만난 때가 군에서 제대하기 일 년 전쯤이었으니 그전까지 꽤나 오랜 기간을 나 혼자 기차 여행을 한 셈이었다. 아내를 만난 뒤에는 나 혼자 여행을 한 적이 없으니 내 방랑벽에 종지부를 찍어 준 사람은 결국 아내였다. 아니 아내를 만난 뒤로는 혼자 여행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내 곁엔 항상 아내가 있었고 아내 곁엔 항상 내가 있었다. 기차가 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개의 철로가 필요하듯이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아내와 나는 같이 삶을 지탱하고 인도하는 두 개의 길이었다. "당신 처음 만났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 데 벌써 사십 년이 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당신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 하우?"라고 내가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요, 당신이 그날 입고 나왔던 양복 색깔까지 선명하게 기억하는데요, "하고 말하는 아내의 큰 눈동자 안에 옛날 젊었을 때의 우리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당신 그때 정말 예뻤었는데, "라고 내가 말하자 아내가 "당신도 괜찮았어요, "하고 받았다. 그리고서는 둘 다 괜히 쑥스러워 서로를 보며 쿡쿡 거리며 웃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카페를 나와서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걸어 기차역을 향했다. 오후의 늦은 햇살이 따사롭게 우리 등을 어루만졌고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가 앞에서 우리를 안내했다. 기차역은 한산했고 파파쿠라까지 가는 두 칸짜리 기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있다 기차는 떠났고 창문 안으로 넘어 들어오는 가을 오후의 햇살이 우리 두 사람을 따라오는 것 같았다. 기차는 계속 달렸고 철로 위를 달려 나가는 기차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고 우리가 탄 기차 칸에는 우리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문득 우리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이 기차 안에서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결국 우리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가 부모님의 극진한 축복 속에 둘이 만나 결혼하여 사십 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그 사이 양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우리 사랑의 열매로 태어난 두 딸도 모두 결혼하여 하나는 한국에서 하나는 호주에서 저희들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지금 남은 건 결국 우리 둘 뿐이었다. 다행히 딸 둘 모두가 나름대로 제 앞가림을 하면서 살아가기에 너무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 걱정 마시고 아빠 엄마 두 분이 건강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사세요, "하고 딸들이 전화로 카톡으로 안부를 전해 올 때마다 우리 부부는 서로 다짐했었다. 우리가 딸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돈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우리가 삶으로 보여줄 건강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노년의 삶이라고. 우리가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서 딸들에게 아름다운 삶의 본보기를 유산으로 남겨주자고. 


언젠가 작은 딸이 아내와 전화로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 우리 신랑이 우리도 나이 들면 아빠 엄마처럼 살자고 그랬어, "라고 했다고 아내가 말했다. 딸의 말을 듣고 우리는 우리의 삶이 그래도 바른 궤도 위를 가고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책임이 무거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기차여행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궁극적인 종착역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정해져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마치 기차여행을 하듯 우리는 이 정거장 저 정거장에서 우리가 탄 칸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 사람들 중에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지만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 종착역까지 같이 가는 사람은 결국 부부뿐이다. 종착역이 마무리 먼 곳에 있어도 기차는 계속 달리고 종착역은 가까워진다. 언젠가 어느 포도주 회사의 광고 문구에 나온 ‘인생은 나쁜 포도주를 마시기에는 너무 짧다’라는 구절을 보고 웃은 기억이 있다. 자기 회사의 좋은 포도주를 마시라는 광고였지만 나는 ‘인생은 누군가를 미워하기에는 너무 짧다,’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서로 사랑하고 살기에만도 우리들의 삶은 너무도 짧기만 하다. 기차의 같은 칸에 탔다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귀한 인연이다. 하물며 바로 옆자리의 부부로 만난다는 것은 하늘이 정해주지 않는 인연이면 불가능하다. 그 귀한 인연을 아름다운 삶으로 이루어 가는 것은 순전히 두 사람의 노력에 달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행을 마치며


무엇 때문인지 기차가 크게 한번 덜컹거렸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고 옆에 있는 아내가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창밖을 보고 있는 아내의 어깨에 팔을 올리자 "뭘 그렇게 생각하셨어요?"하고 아내가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아내의 눈이 더욱 크게 보였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눈이었다. "어, 그냥. 어떻게 하면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런 거 생각했지, "하고 내가 우물거리자 "어이구 또 거짓말하시네, "하고 아내가 소녀처럼 웃었다.


4월의 그 어느 날 급작스럽게 나선 기차여행이었지만 우리 부부에게 작지만 신선한 기쁨을 준 기차여행이었다. 아무도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준비하고 태어나지 않지만 주어진 궤도 위에서 열심히 살아갈 때 행복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날 우리의 기차여행은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되었어도 행복하기만 했었다.


2018. 6. 27 

매거진의 이전글 늘그막에 100일간의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