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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Aug 17. 2020

거울 앞에서

誰知明鏡裏 누가 알리오 거울 속 사정

화요일 저녁이면 집안이 떠들썩해진다. 매주 우리 집에서 열리는 화요음악회를 찾아 사람들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에도 시간이 되자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들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자분들은 여자분들끼리 남자분들은 남자분들끼리 자연스레 모여 앉아 손에 찻잔을 들고 정담을 나누었다. 나도 남자분들 틈에 끼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별안간 여자분들 모인 곳에서 커다랗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나고 어느 분 하나는 큰 목소리로 “어머, 말도 안 돼. 이 사진이 석운 님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호기심이 동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여자분들 있는 곳으로 갔다.

젊은 날의 모습

내가 가까이 가자 큰 목소리의 주인공 여자분께서 작은 액자를 높이 들면서 나와 액자를 번갈아 보면서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보세요. 여기 사진 속의 젊은이가 석운 님 같아요? 난 도저히 아니에요.” 하고 물었다. 무슨 사진인가 내가 보았더니 약혼 시절의 나와 아내가 테니스장에서 찍은 흑백 사진이었다. 사십 년도 더 지난 옛 사진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 액자가 오늘 밖에 나와 있다가 여자분들 눈에 뜨여 나와 아내의 젊은 모습이, 특히 내가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사진 속의 나는 머리에 숱이 많은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의 젊은이였고 지금의 나는 머리가 다 빠져 항시 모자를 쓸 수밖에 없는 늙은이였으니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여자분의 생각이었다.


“그거 저 맞는데요,”하고 내가 우물쭈물하자 몇몇의 다른 여자분들이 “그래요. 석운 님 맞는 것 같은데요. 아직도 젊은 시절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데요,”하고 내 편을 들어주었다. 그 소리에 힘을 얻어 나는, “그렇지요? 저도 한때는 머리카락이 많았을 때가 있었어요,”하고 말했다. 여자분 몇몇이 까르르 웃었고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다음 날 아침 식사 후 나는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전을 가지러 서재로 향하다가 문득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책을 읽느라고 썼던 안경을 그대로 끼고 있었기에 내 얼굴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그때까지 안경을 끼고 거울 앞에 섰었던 때가 없었기에 나는 선명하게 비친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랬다. 윗머리가 거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옆머리는 허연 터럭이 되어있었고 얼굴의 굵은 주름살들이 너무도 돋보였다. 


나는 엊저녁 여자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문제의 액자를 들고 와 사진 속의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도저히 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군!”

그 순간 머릿속에 번개처럼 떠오르는 시 한 구절이 있었다.


-誰知明鏡裏 누가 알리오 거울 속 사정

形影自相憐 내 모습(形)과 거울에 비친 그림자(影)가 서로 딱하게 여기네-

<장구령(張九齡)의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에서>


청운의 뜻을 품었던 장구령이 잘못된 세월만 지난 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늘어난 백발을 보고 찬탄하여 읊은 시(詩)였다. 그와 내가 살았던 시대는 달랐지만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늙은 모습에 놀라 탄식하는 마음은 너무도 비슷하였다. 잠깐이지만 그날 아침 나는 장구령과 같이 거울 앞에서 망연자실하였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사진과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수지명경리誰知明鏡裏 형영자상련形影自相憐을 몇 번씩 되뇌었다.


“뭐 하세요, 거울 앞에서?”하고 마침 거실 밖으로 나오던 아내가 내게 물었다. “어, 아니, 이 액자 제자리가 어디였지? 갖다 두려고……” 하면서 나는 장난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얼버무렸다. “이리 주세요, 제가 갖다 놓을게요,”하고 아내가 내 손에서 액자를 빼앗듯이 가져갔다. 그리곤 사진을 잠깐 들여다보더니, “와 당신 이땐 꽤 괜찮았네요. 지금과는 딴 판이네요,”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는 아내의 모습이 밉지 않아서 나도 한마디 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나한테 왔겠지.” 나의 말에 아내는 “어이구 아직도 말씀은 잘하셔,”하더니 나를 향해 입을 비쭉 내밀고 돌아서 액자를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아내의 모습에서 나는 먼 옛날 사진 속에서의 아내의 모습을 느꼈다. 


그 날 시 한 편을 썼다.


거울 앞에서


문득 

거울 앞에서 느낀 가버린 세월

그리고

거울 앞에선 나를 보는 거울 속의 나

젊은 날엔 내가 그를 보았으나 이젠 그가 나를 보네


거울 속의 그에게 묻고 싶네

오랜 세월 나를 보아온 그대

지금 나를 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소

거울 앞에선 옛 시인이 

照鏡見白髮 스스로의 백발을 보고 

誰知明鏡裏 누가 알리오 거울 속 사정

부르짖은 그 마음 이제 알겠네


한참이나 거울 앞에 서있으려니

거울 속 내가 소리 없는 음성으로 내게 말을 전하네

내가 당신의 그림자(影)이듯

거울 밖 당신은 또 누군가의 겉모습(形)에 불과하다오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당신에게 돌아가시오


그때 깨달았네

形影自相憐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마음을

거울 속 나도 거울 밖 나도

백발(白髮)이 되도록 나를 못 찾고 

방황하는 나를 보고 딱하게 여기고 있었네.


 2017. 9. 12 석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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