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다는 것’과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을 주제로 한 두 편의 시(詩)를 읽고

by 석운 김동찬

‘가난하다는 것’과 ‘가난하다는 것은’, 두 편의 시를 읽고


두 편의 시를 읽었습니다. 어느 문학 카페에 올라온 안도현 시인의 시 ‘가난하다는 것’을 읽고나서 언젠가 읽었던 이상국 시인의 시 ‘가난하다는 것은’이 생각나서 다시 읽었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과 같이 감상하고 싶어 여기 두 편을 다시 올립니다.



가난하다는 것 안도현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보다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쪽이 비어 있어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왠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난이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으면 무엇이 가난한 사람을 울릴까요? 그들을 가난하다고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울릴까요?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운다면 그 사람은 아직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낄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상대적 빈곤감을 가진 사람을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두 째 연에 가난하지 않은 사람보다 오직 한 웅큼만 덜 가졌다라고 했으니 아마도 그런 사람들을 지칭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은 한쪽 가슴이 비어있을 수는 있어도 그곳은 사랑을 채울 자리로 마련되어 있는 곳이 아니고 스스로의 상대적 빈곤감을 채우기에도 바쁜 욕심의 자리이기에 시인의 말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 연에 돌연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이들이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만일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면 저는 시인에게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두려운 것은 가난입니다. 오늘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한쪽 가슴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둔 사람이라는 둥 혹은 사랑이 있기에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둥 하고 말하면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가난을 추상적으로 느끼거나 사유할 때 이런 시도 나올 수 있겠지만 정말로 가난해 보았거나 아니면 가난한 사람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 가난을 처절하게 통감한다면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그리하여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마저도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시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다른 한 편의 시, ‘가난하다는 것은’을 보겠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이상국


-세사 어머이를 이렇게 패는 눔이 어딨너


-돈 내놔, 나가면 될 거 아냐


연탄재 아무렇게나 버려진 좁은 골목 담벼락에다

아들이 어머니를 자꾸 밀어붙인다


-차라리 날 잡아먹어라 이눔아


누가 아들을 떼어내다가 연탄재 위에 쓰러뜨렸는데

어머니가 얼른 그 머리를 감싸안았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높다라는 뜻입니다


이 시를 읽고 제가 느낀 것은 왜 이 시의 제목이 ‘가난하다는 것은’일까 라는 의문이었습니다.


돈 내놓으라고 어머니를 패는 패륜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아이의 버릇이 이렇게 나빠진 것은 이제껏 이 아이에게 걸핏하면 돈을 주어왔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더 어렸었을 때에는 엄마를 팰 수 없었을 터이니 대신 땅바닥에 주저앉아 떼를 쓰거나 아니면 끝없이 울음보를 터뜨려서 결국은 돈을 받아내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서 돈을 줄 수 있었건 아니면 여전히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울고 고집부리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어디서 꾸어서라도 돈을 주었기에 지금 같은 처지에까지 이르렀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어머니들의 행동을 저는 결코 모성애라든가 사랑의 발로라든가 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정말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어려서부터라도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돈을 주더라도 돈을 주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더라면 오늘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돈 달라고 떼 부리고 뭐든지 제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들의 말을 그대로 들어주는 것은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귀찮고 성가시기에 우선 편하기 위해 행동하는 게으름이지 결코 어머니(혹은 부모)의 사랑이 아닙니다. 가난하기에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여유가 없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가르침은 가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난하다면 내 아이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가르침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4번째 연에서 ‘어머니가 얼른 그 머리를 감싸 안았습니다’라는 구절을 읽고 저는 거의 분노했습니다. 혹자는 이 구절이 어머니의 지고한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하는 데 저는 이런 잘못된 사랑이 아이도 버려놓고 가정도 파탄시키고 나중에는 이런 아이들이 속하는 사회까지 버려놓는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건 결코 사랑이 아니고 잘못된 보호 본능에 불과합니다. 머리를 감싸 안아 주었던 그 아이가 잠깐 뒤 일어나 다시 그 어머니에게 뭐라고 할까요? ‘엄마 내가 잘못했어요,’라고 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더 큰 소리로 돈 내놓으라고 어머니를 윽박지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 돌연 ‘가난하다는 것은 높다라는 뜻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저는 어안이 벙벙합니다. 왜 이런 가난이 높은 것일까요? 요즈음 많은 시들이 금언(金言)이나 아니면 선(禪)의 일갈과 같은 구절을 느닷없이 써놓고 근사한 시인 양 하는 경우가 많은 데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난은 결코 죄가 아니지만 가난하다고 죄를 짓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가난은 그 자체가 부끄러움은 아니지만 벗어나려는 노력이 없으면 부끄러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가난은 불편함입니다. 요즈음 무소유의 기쁨이니 내려놓음의 즐거움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처럼 만연하지만 이런 말들은 최소한의 의식주가 해결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당장 저녁 끼니가 감감하고 지친 몸 뉘일 곳이 없는 사람에게 ‘가난하다는 것은 높다’라고 말하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성경의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오늘 가난에 관한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제가 위의 성경 구절이 생각나는 것은 두 편의 시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평안히 가라, 더웁게 가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헛된 구호만을 외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 편의 시가 시인의 눈을 통해 언어로 표현된 삶의 단면이라고 할 때 미당 서정주의 말대로 시는 어떤 관념이나 주장을 추상적으로 편집하고 박제한 ‘표어’가 아니라 영혼의 맨살에 닿을 듯한 강렬한 체험의 언어라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시는 읽는 사람에게 공허한 꽹과리가 되지 않고 행함이 없는 믿음처럼 그 자체가 죽은 시가 되지 않고 가슴을 울리는 이익을 주는 시가 될 것입니다.


두 분 시인 모두가 훌륭한 시인인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어느 훌륭한 시인에게도 태작(駄作)은 있게 마련이기에 감히 이렇게 느낌을 적어보았습니다. 물론 저와는 달리 이 두 편의 시를 읽고 나름대로의 감동을 받으신 분들도 많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와는 다른 그분들의 의견이나 느낌도 제 생각만큼 귀중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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