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올 전시에서 만난 아름다움의 조각들
요즘은 무얼 보아도 큰 흥미가 없고 웬만해선 쉽게 반응하지 않는다. 모든 감정이 납작하게만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 감정이 가장 먼저 늙는다는데 어쩌면 벌써 감정에도 노화가 시작된건가 싶다. 그런데 최근 디올 Christian Dior: Designer of Dreams 전시에서 한 벌의 드레스를 마주하고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숨죽이게 되었다. 몸선을 따라 흐르는 물결 모양 장식과 섬세한 실루엣, 손끝으로 하나하나 달았을 비즈 장식들이 마치 누군가의 시간을 고요히 건네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감정은 모처럼 쉽게 느낄 수 없기에 특별하다. 작고 정교한 것 앞에서 숨죽이게 되는 마음이다.
명품 브랜드의 명성에 맞게 화려할 줄만 알았던 디올의 전시는 더 섬세하고 완성도가 높은 전시였다. 나는 전시장에 발을 딛은 첫 순간이 그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결정짓는다고 믿는다. 소란스럽고 밝은 바깥 세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그 ‘전환의 순간’이 전시의 임팩트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마치 놀이공원 입구만 봐도 가슴이 두근대는 것처럼, 전시장의 입구는 설렘과 압도감의 미학을 담아 설계되어야 한다. 디올의 전시 입구는 1947년 첫 디올이 자신의 첫 컬렉션을 선보인 호텔 파티큘리에서 모티브를 따와 제작되었다고 한다. 하늘하늘한 천 위에 프린팅된 흑백의 이미지는 마치 몽테뉴가 30번지로 입성하는 초대장 같았다. 손을 대면 사라질 듯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설계한 섬세하고 우아한 입구였다.
전시장은 디올의 시대적 변화와 디자이너별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디올의 상징인 ‘뉴룩’부터가방과 향수까지 함께 어우러진 '토탈룩'을 통해 디올이 구축하고자 했던 세계관을 확실히 전달했다. 이렇게 각 잡고 아름다운 것만 모아둔 곳이라니! 소비자는 속절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 입구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단연 피날레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나가기 전에 마련된 '무도회' 컨셉의 공간이었다. 전반적인 전시 구성의 완결성을 신경 쓴 게 느껴졌는데 보통 관람객들이 앉아서 감상하며 쉬는 공간은 전시장 중간에 배치하는 반면, 가장 마지막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전시의 피날레를 충분히 만끽하면서 여운을 가져갈 수 있게 구성하였다. 반짝이는 드레스와 계단식 조형물, 음악에 맞춰 변하는 디지털 아트는 극적인 연출을 통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번 디올의 전시는 한국에서 쉽게 보기 힘든 디자이너의 역사를 담은 규모있는 아카이브 전시라 기대를 했던 건 사실이지만 마지막 날까지 방문을 미뤘던 이유는 왠지 모르게 숙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수한 인파와 포토존을 피하여 전시를 온전히 감상할 자신이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 날 왠지 안가면 후회할 것 같다는 직감에 오픈런 끝에 겨우 들어간 전시였다. 때로는 '굳이'했던 일들이 귀찮음을 무릅쓰고 비효율을 택한 나에게 선물이라도 주듯 뜻하지 않은 감동의 순간을 선사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잃지 않고 싶은 건, 작고 정교한 것 앞에서 숨죽이게 되는 마음이다. 그러니 때로는 마음이 끌리지만 망설였던 곳에 '굳이' 가 보기를 바란다. 그 곳에서 예기치 못하게 선물같이 황홀한 순간을 마주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창조적 영감은 마치 나무에서 수액이 흐르듯 하우스 전체에 스며들어 견습생과 재봉사들의 손끝을 스치고, 투왈(toile) 위를 바쁘게 오가며 바느질을 하거나 솔기 앞에서 머뭇거리는 손끝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바로 그 손끝에서 미래의 스타일이 탄생하는 것이다. - Christian Di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