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만끽하는 방법
여름이 되면 유독 마음이 바빠진다. 어릴 적 여름방학 숙제를 후다닥 몰아서 했던 초등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여름에만 할 수 있는 숙제 리스트를 갖고 있다가 기회를 호시탐탐 보며 하나씩 지워 나간다. 딱 몇 주간만 먹을 수 있다는 한국의 납작 복숭아 대극천은 지난주에 먹었고, 이번 주에는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는다고 나와서는 회사 근처에 평양냉면집을 찾아 드디어 평양냉면 한 그릇을 먹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이번 여름에는 유독 여름을 잘 챙기기 위해 꼭 해야 할 리스트들이 자주 눈에 보인다. 그런데 왜 유독 여름일까? 벚꽃도 봄에만 볼 수 있고, 붕어빵도 겨울에 챙겨 먹어야 제맛인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일단 한 가지 유력한 이유는 여름은 다른 계절보다 심상이 강력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여름 하면 떠오른 심상들이 많다.
부서지는 햇빛과 푸른 나무들,
기나긴 장마 때 밖에 나가면 비 내음,
귓가를 때리는 맴맴 메미소리,
얼음을 넣어 물방울이 또르륵 떨어지는 차가운 컵을 잡은 손에 감각까지
여름은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을 모두 자극하는 공감각적 계절이자 그와 동시에 많은 감각이 지치는 계절이기도 하다. 무더운 날씨에 입맛은 뚝 떨어지고, 버스를 타면 여러 사람의 땀냄새에 후각은 마비될 것만 같다. 그럴 때 나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 빙수 한 스푼, 달큼한 복숭아 한 입은 가뭄의 단비처럼 나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심상이 된다.
실제로 나는 아직도 대학교 1학년 신입생 환영회 때 술을 엄청 마시고 숙취에 시달리다 잠결에 일어나 먹은 헛개수 한 모금의 맛을 잊지 못해 아직도 갈증이 심한 날 편의점에 가면 많은 음료들 속에서 헛개수를 집어 든다. 나의 감각을 살려줬던 것을 몸이 본능적으로 찾는 것이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통과의례처럼 평소에 잘 찾지 않는 콩국수와 평양냉면을 꼭 찾아 먹고, 초당옥수수와 복숭아를 항상 냉장고에 구비해 둔다. 언제든 지친 감각을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여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심상은 국가별로 다르다. 지금 당장 핀터레스트를 켜서 'summer aesthetic'을 검색해 보면 파라솔, 반짝이는 바다, 태닝 하면서 독서와 같은 장면이 나온다. 아름답지만 한국인인 나에게는 역시 와닿지 않는 여름의 모습이다.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여름 제품들의 심상은 일본의 여름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릴 때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메론소다나 청량한 배경을 바탕으로 자전거를 타는 교복 입은 학생들, 불꽃축제 같은 것들. 어쩌면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는 것은 어렸을 적 애니메이션으로 접했던 장면들이 꽤 강력한 심상으로 자리 잡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뭐니 뭐니 해도 한국의 여름은 할머니댁에 놀러 간 여름방학이 아닐 수 없다. 잠자리채, 선풍기, 화채, 마룻바닥, 계곡물에 담가 차가워진 수박, 운동장을 울리는 매미소리가 선연하다.
이제 나는 운동장 대신 버스 정류장을 지나 출근을 하고, 이제 아무도 숙제를 내주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때로는 인생에도 숙제가 필요하다. 억지로 하지 않으면, 흔적을 남겨놓지 않으면 금세 사라져 버릴 것이니까. 이번 여름은 유독 애틋한 마음이 들어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에게 여름방학 숙제를 내주었다. 스스로 숙제를 내고 검사를 맡는다는 것이 조금은 우습지만 때로는 벼락치기를 하듯,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며 하나씩 숙제 목록을 지워가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으니 한번 리스트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이번 여름 내가 나에게 내준 여름방학 숙제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맛있는 빙수 먹기
2. 강렬한 빨간색 옷 입고 외출하기
3. 복숭아 새로운 품종 도전해 보기
4. 에어컨을 틀어놓고 차가운 음료를 마시며 좋아하는 웹툰 보기
5. 여름의 심상이 잘 나타난 책 읽기
벌써 2개의 숙제는 완료했다. 이번 주말에는 서점에 가서 여름 느낌이 나는 책 표지를 골라 읽어 볼 생각이다.
겨울잠을 대비해 열심히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기억 속 아카이빙에서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게 차곡차곡 여름의 저장고를 채워둔다. 그렇게 부지런히 여름의 심상을 만들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