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불안

나의 불안을 잠재워준 작품들

by 무화원

내가 처음 '불안'이란 감정을 몸으로 느낀 것은 직장 생활 4년 차, 중요한 클라이언트의 프로젝트 보고날이었다. 언제나처럼 회사로 출근하는 버스에 탔는데 그날은 유독 가슴이 두근대고 숨을 쉬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프로젝트 보고를 마쳤지만 나는 불안이 내 몸으로 전이된 순간의 감각을 잊기 어려웠다. 언제 이런 신체적 증상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은 불안을 더 가속화시켰다. 그 이후로 불안장애에 대한 유튜브, 책, 심리 검사 등을 많이 찾아봤다. 호흡, 명상, 산책 등 많은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불안을 인지한 순간부터 내 삶에서 불안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은 어려웠다.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불안과 마주해야 했다. 무언가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누군가가 권위적으로 명령하는 상황에서 어김없이 불안이 찾아왔다. 어느 날 '아 어쩌면 나는 평생 이 불안과 함께 살아가겠구나.'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몇 번의 불안을 마주하고 나니 어느덧 불안함을 다스리는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다. 내가 찾은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불안한 사람들이 화자가 되는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다. 불안을 피하기 위해서 억지로 행복하거나, 아무 걱정 없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을 잘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불안한 사람들이 가장 가지면 좋지 않은 마음가짐은 "왜 나만 이럴까?"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불안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방법이 다를 뿐이다.


언뜻 보면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마음이 동하는 작품에는 항상 불안이 있었다. 수많은 불안한 날들을 잠재워준 불안의 동반자들을 소개한다. 누군가의 불안에도 특효약이 되길 바라면서.


Book

<양귀자 - 모순>

출처 : 알라딘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책을 좋아하지만 어릴 때부터 소설책은 잘 읽지 않았다. 내가 굳이 찾지 않더라도 동화책 혹은 국어 지문의 형태로 만났기 때문이어서일까, 아니면 지나가는 길 고양이만 봐도 눈물을 글썽이지만 슬프기로 소문난 영화에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성격 때문일까. 가공된 허구의 이야기에는 특히 엄격했다. 소설책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소설의 주인공만큼이나 입체적이라고 느껴진 순간부터이다. 땅에 발을 딛지 않고 허공을 떠도는 것처럼 느껴졌던 이야기들이 때로는 나, 때로는 가족, 때로는 내 주변 인물들의 모습으로 내 옆에 있었다. 성인이 되어 가장 처음 읽는 소설은 양귀자의 <모순>. 항상 베스트셀러에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인생책이라고 꼽히는 이 작품이 늘 궁금했다.


이 책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부잣집에 시집간 이모와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온 엄마의 이야기가 주인공 안진진의 눈을 통해 교차되어 그려진다. 그녀는 행복해 보이는 삶의 조건과 불행해 보이는 삶의 조건들을 대차대조표에 놓고 비교하지만 행복이란 것은 그렇게 정량적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이 책을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는 모순이지만 내가 느낀 주된 정서는 ‘권태감’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은 타인의 인정이 아닌 내가 내 발로 땅을 딛고 있다는 현실 감각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작품이다. 공교롭게 이 책을 읽었던 때 삶이 권태로웠기에 이 이야기는 곧 내 이야기가 되었다.


Song

<자우림 - 있지>

출처 : Bugs
있지, 어제는 바람이 너무 좋아서 그냥 걸었어.

때로는 어떤 극적이고 아름다운 표현보다 너무나 일상적이라 가사로는 잘 쓰지 않는 말들이 더 특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있지, 어제는 바람이 너무 좋아서 그냥 걸었어."로 시작되는 자우림의 <있지>가 그렇다. 여기서 ‘있지’는 중의적 표현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있잖아'와 무언가가 '있다'는 뜻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 '있지'는 전자의 의미로 어떤 외로운 사람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로울 때, 공허할 때, 그리고 정말 바람이 좋을 때마다 이 노래가 생각났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을 때 이 노래를 들었다.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주면 더 서러워 울고 마는 아이처럼 잔잔하게 시작하여 점점 고조되는 목소리와 감정선은 별것 아닌 걸로 치부했던 내 감정에 솔직해지게 했다.


이 노래를 꽤 오래 들었을 즈음 나는 두 번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이 노래를 들을 때 나는 청자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런 날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이 있었고, 그런 감정이 있었다.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나를 짓누르던 많은 것들이 해소되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날들을 이 노래를 통해 위로받았다.


Movie

<론 클레먼츠, 존 머스커 - 모아나>

출처 : 디즈니
정말 착한 딸이 되고 싶어. 하지만 난 이렇게 바닷가에 또 서있어

영화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가장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다. 가보고 싶은 삶의 갈래가 많아 인생 영화를 묻는 질문 앞에서는 항상 고민하지만 가장 닮고 싶은 영화 속 캐릭터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모아나'라고 답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항상 모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음이 설렜다. 그렇기에 튼튼한 몸과 정신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모아나는 나에게 부족한 용감함을 똘똘 모아 만든 이상적인 페르소나였다. 모아나는 불안하지만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에만 머물지 않는 용기로 불안을 이겨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작은 마음의 소리를 놓지 않으려는 집요함이 끝내 불안을 이긴다.


영화의 메인 주제곡인 <How far I‘ll go>는 내가 출근길에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이기도 하다. 착실한 딸로 살아가며 매일같이 몸은 회사로 향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바닷가 앞에 있었다. 언젠가 나도 꿈을 찾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출근버스에 내려 내 마음이 닿는 곳으로 항해하는 상상을 하며 내 마음속에 모아나를 키워갔다.


오늘도 불안한 하루가 지속되었다면 그래서 어쩌면 이 굴레에서 평생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불안의 바다에 빠져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불안함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니 이 반려불안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두자. 생각보다 수심은 깊지 않아 물에 빠지더라도 가뿐히 몸을 일으켜 두 발을 딛고 서 있게 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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