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음

가장 단순한 형태의 행복

by 무화원

퇴근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애니메이션 굿즈를 얻기 위해 영화관 두 곳을 돌았다. 분명 다른 사람들이 재밌다고 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어쩌다가 본 쇼츠에서 이른바 '덕통사고'를 당한 후로 애니메이션과 만화책 정주행은 물론, 극장판으로까지 보고자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은 것이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조금 더 큰 화면과 좋은 사운드로 보고 싶다는 순수한 애정은 계속해서 온갖 영화관의 상영 시간표와 실시간 굿즈 현황을 검색하여 최적의 극장을 찾게 만들었다. 왜 요즘은 영화관마다 주는 굿즈가 다른 건지, 주차별로 굿즈는 왜 바뀌는 건지, 왜 하필 굿즈들은 모두 랜덤인 건지. 예전에 덕질을 할 때와는 확연히 높아진 난이도로 고작 영화 하나를 어디서 볼지 정하지 못해 몇 시간을 찾아 헤맸다.


'그냥 아무렇게나 보면 되지. 내가 조금만 무던했다면 몸도 마음도 훨씬 편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에 스쳤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타협이 안된다. 무언가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은 좀처럼 쉽게 생기기 어려운 이벤트이므로 지금은 비효율적이더라도 이 마음에 충실할 계획이다.


아주 작게라도 마음에 파동이 울려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간질간질한 마음이 들면 이제는 반가운 마음부터 든다.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순수하게 즐기거나 좋아하는 마음은 내가 마음을 먹는다고 쉽게 생기지 않았다. 이를 테면, 너무 갖고 싶은 옷이 있어서 그 사이트만 하루 종일 들락날락거리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무대를 보기 위해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 방송을 알람을 맞춰놓고 라이브로 보거나, 브로마이드를 얻기 위해 서점 여러 군데를 돌면서 앨범을 사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는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에서만 나오는 '슈퍼파워'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긴 학창 시절이 지나고 나면, 그 헤픈 웃음마저 청춘의 특권임을 알게 된다. 하루는 아주 사소한 것 때문에 배가 아프고 눈물이 날 정도로 웃은 적이 있는데, 웃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배의 아릿한 감각이 너무 오랜만이라 순간 '아 나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이지'라는 드라마 대사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순수하게 즐기는 마음, 무언가를 좋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다. 요즘은 좋아하는 마음이 두둥실 떠오를 때마다 간단히 메모를 남겨 기록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귀해질 마음이 분명하므로,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어떤 상황과 그때의 감정을 구슬로 만드는 것처럼 나도 '좋아하는 마음 구슬'을 몇 개 만들어 두기로 한다.


가장 최근에 만든 좋아하는 마음 구슬은 '무화과 리코타치즈 샐러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즉각적으로 행복해지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데, 특히 그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그 기쁨은 배가 된다.


나는 가을이 되면 꼭 샐러드셀러의 무화과 리코타 샐러드를 먹는데 무화과와 루꼴라, 리코타 치즈를 크게 한 입 먹으면 비로소 가을이 왔음을 감각한다. 올해는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유독 가을이 짧을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에 무화과철에만 나오는 이 샐러드를 놓칠까 봐 시간을 내어 부랴부랴 다녀왔다. 한남동은 생각보다 갈 일이 없는 동네이지만 매년 이 샐러드를 먹으러 꼭 이맘때쯤 한 번씩 방문한다. 누가 보면 유난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때로는 그 유난 덕분에 살아가는 게 인생 아니던가.


올해의 마지막 무화과 샐러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나, 집에서 따라 할 수 있을까 곱씹으며 먹어 본다. 샐러드셀러의 무화과 샐러드는 얇게 썬 오이와 말린 청포도(건포도가 아니다!)가 들어가는데 이 엉뚱한 조합이 엄청나게 조화로운 맛을 만들어낸다. 무화과는 다른 과일들과는 다르게 중후한 단맛이 있는데(누군가는 무맛이라고 표현하지만) 상쾌한 오이의 맛과 청포도의 상큼 달달한 맛이 무화과의 단맛을 최상으로 끌어올린다. 포크로 샐러드를 헤집으며 찬찬히 살펴보니 생각보다 더 많은 재료가 들어갔다. 역시 이 조화로운 맛은 그냥 나오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내년에는 또 이 샐러드를 먹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기대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갈 힘이 있다는 증거. 다들 좋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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