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비일상으로 만드는 법
최근 점심시간에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다 한 문장에서 손이 멈춰졌다.
“좋아하는 옷을 입은 날엔 천천히 집에 돌아간다.”
이는 후쿠오카의 한 패션 백화점 마츠야 레이디스의 포스터 문구였다고 한다. 사실 이런 류의 카피를 보면 질투가 먼저 난다. 누구나 아는 쉬운 언어로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정과 상황을 포착해 낸다는 것은 대단한 재능이다. 실제로도 백화점 매출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하니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에 공감했으리라 생각한다.
폴린 브라운의 저서 <사고 싶게 만드는 것들>에서 일상 속에서 미적 지능을 높일 수 있는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입을 옷을 전날 미리 골라놓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나도 대학교 신입생 때 전날 저녁에 어떤 옷을 입을지 무려 가방까지 골라놓고 잠들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 열정은 대학에 가면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어른들의 말이 만든 묘한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 애들에게 꿇리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매일 작은 자취방 옷장을 열심히 뒤지며 몇 벌 없는 옷에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냈다.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은 날에는 일부러 친구들과 약속을 잡기도 하고, 캠퍼스를 거니는 발걸음이 좀 더 뿌듯했던 것 같다. 반면 전날 옷을 골라놓지 못하거나 끝끝내 최적의 조합을 찾지 못하고 나온 날에는, 수업이 끝나면 누가 볼세라 곧장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나만의 작은 놀이였던 전날 옷 고르기는 취준생 시절을 지나 사회초년생이 되면서 끝이 났다. 대학생 때 자주 즐겨 입던 테니스 스커트는 가장 먼저 옷장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고, 어느새 내 옷장을 채운 건 검은색, 흰색 옷들과 슬랙스와 셔츠였다. 누구나 입어도 그럴듯한 직장인처럼 보이는, 그리고 누구도 관심을 갖거나 책 잡지 않을 법한 무난한 옷들. 그럴듯한 직장인의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사실 내 옆자리 사람이나 옆옆자리 동료의 옷과 바꾸어 입는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난해진 옷차림만큼 좋아하는 옷을 입었을 때의 설렘도 점차 사라졌다. 대학생 때는 사고 싶은 옷을 잔뜩 저장해 두고, 매일 들어가 보며 가격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예쁘고 비싼 옷들의 대체제를 보세 쇼핑몰에서 찾아보고, 500원 쿠폰까지 악착같이 챙겨 옷을 사 입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W컨셉이나 29CM의 베스트 카테고리에 있는 하나당 10만 원이 넘는 옷들을 보며 “요즘 옷값은 왜 이렇게 비싸?” 하고 투덜대면서도 큰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학생 때보다 더 옷을 못 입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내가 버리지 못한 원칙이 하나 있다. 어떤 옷의 디테일, 소재, 실루엣 삼박자가 모두 나의 취향에 꼭 들어맞으면 산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주로 트위드 소재의 밝은 원피스가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 실용적인 목적의 옷이 아니라 1년에 한두 번, 그나마 결혼식장에나 입을 법한 옷이지만 내 취향이 깊이 스며든 어떤 제품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열렬히 옷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옷들은 내 옷장에서 다른 옷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채 어색하게 한쪽을 채우고 있지만 있지만, 이따금씩 옷장을 열어 가만히 보기만 해도 흐뭇해진다. 마치 내가 끝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 나의 취향 같아서.
또 하나 놓지 못한 습관은 여행 룩을 미리 계획하는 것이다. 늦어도 일주일, 보통은 한 달 전부터 여행 일정에 맞춰 그날 무엇을 입을지를 고민한다. 이때 옷을 고르는 기준은 그 도시의 풍경과 가장 잘 어울리는 무드로 입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하이에 갈 때는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화려한 현지인의 스타일에 묻히지 않을, 회사에는 절대 입고 갈 수 없는 큐빅이나 보석이 달린 과감한 옷을 챙긴다. 교토에 갈 때는 잔잔하고 고즈넉한 풍경에 어울릴 여유로운 실루엣과 흰색·내추럴 계열의 옷을 고른다. 미국 여행에는 평소 잘 입지 않는 캐주얼 무드의 로고가 있는 옷, 짧은 스커트, 잘 어울려서 쓰지 않는 캡모자도 꼭 챙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그때 찍었던 사진들을 모아보면마치 나만의 작은 룩북을 시즌별로 넘겨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나이지만 묘하게 나 같지 않은 사진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나에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은 꽤 슬픈 일이지만, 옷이야말로 나의 판타지를 채워줄 수 있는 가장 멋진 도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옷을 통해 매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일상을 벗어난 비일상에서 나는 고작 옷차림 하나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나를 처음 본 사람의 눈에는 내가 평범하고 지루한 직장인이 아니길 바라는 이상한 반항심으로 더 과감한 옷을 챙겨 입는다.
무심코 비친 거울 속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예쁜 옷을 직장에 입고 가기엔 아깝다는 마음이 든다면,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가보는 것도 좋겠다. 어쩌면 지루했던 출퇴근길이 조금은 나만의 작은 런웨이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