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결코 부자는 아니었지만 살면서 자기 수중에 돈이 없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여섯 살, 일곱 살 때부터 부모님, 친척 분들이 용돈을 주시면 거의 쓰지도 않고 꼬깃꼬깃 모아 놓아 만원짜리 뭉치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서랍을 열어보면 돈이 어디갔는지 없어지곤 했다한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듣는 나는 참 답답한데,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한다. 돈은 또 모으면 된다면서.
그렇게 돈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는 남편. 홀홀단신만 챙기면 되던 총각 때와 달리 결혼 후 가정을 꾸려나가며 꽤 이제는 힘에 부쳐한다. 대출금, 매달 생활비, 아이 양육비에, 짠돌이, ‘부자’ 남편도 돈에 빠듯하게 되는 날이 와버렸다. 그런 남편이 의지하는 건 계획과 소비통제인 것 같다. 혹시 모를 상황에의 플랜B, 플랜C... 저렇게까지? 싶을만큼 계획을 하고 계획을 한다. 지금은 진짜 많이 좋아진 편이지만 돈개념이 없는 나와 달리 남편은 정말 돈계산도 빠르고 돈관리를 잘하는 편이긴하다. 내가 가계부에 콩나물 2000원, 고구마 4000원 적고 있을 동안 남편은 적지도 않은 채 “여보~ 우리 이제 이번 달 000000원 썼고, 000000원 남았겠네?”하며 지출과 잔액을 다 파악하고 있다.
또 수입 창출과 재테크에 앞서 우선은 돈이 모이려면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쓰는 걸 줄여야한다고 늘 말한다.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모습을 보면 자기한테 소비하는 게 거의 없긴 하다. 취미도 없고 모임도 거의 없고 일주일에 두 세 번 맥주 한 캔, 1년에 몇 번 친구들과 술 한잔 하는 게 본인에게 쓰는 비용의 다인 것 같다. 내가 뭘 사는 건 거의 터치하지 않고 다 사라하면서 자기한테는 정말 거의 쓰는 게 없다.
연애 때도 내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 늘상 같은 옷을 입고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서 내 남편 별명이 ‘교복남’일 정도로 옷도 한번 사면 10년은 기본으로 입고 산다.
신혼 초에 내가 마음대로 옷을 골라 사오면 나름 또 자기 취향이 있어서 환불한 적이 많아 이제 남편 옷이나 물건 쇼핑도 잘 하지 않는다. 그렇게 짠돌이에 ‘교복남’인 사람인지라 뭘 하나 선물을 사주려해도 진짜, 진짜, 자기 건 절대 사지말라며 정색을 하고 말할 때가 많아 이제는 그냥 원하는대로 내버려둔다.
지난 주말 밤, 아이와 셋이서 수성못 축제에 갔다. 사람도 너무 많고 주차할 곳도 너무 멀어 일단 아이와 내가 먼저 내리고 남편은 주차를 하고 천천히 오기로 했다. 찻잔, 화병, 열쇠고리, 귀걸이, 문구류, 맛나는 간식 등을 파는 플리마켓 부스가 한창이었다. 이런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들 천국인 플리마켓, 꼭 사지 않아도 구경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알뜰한 남편만큼은 아니지만 나 또한 결혼 후 주부로 지내면서 내가 직접 다 청소를 하고 살림을 해야하다보니 '물건= 닦고, 관리하고, 정리해야하는 것'이라는 공식이 머리에 박혀 정말 꼭 필요한 것 아니면 물건을 살 때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생각한 후에 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한 빈티지 화병이 눈에 들어왔다..! 부스를 몇바퀴를 돌다 눈에 밟히던 화병, 결국 구입을 사고야말았다! 우리 아가는 이미 머랭쿠키가 먹고 싶다고 하여 한 손에 꼭 쥐고 돌아다니고 있다.
나와 아기 것만 산 것도 그렇고 워낙 스스로는 뭘 사지를 않는 사람이라 이럴 때 남편 위해 뭘 하나 사주고 싶었다. 마침 술을 좋아하는 남편이 딱 좋아할만 한 소주잔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 전부터 남편이 ‘딴 건 몰라도 소주잔은 내가 맘에 드는 거 하나 사고 싶다’라는 말도 종종 했기에. 나중에 나이 들면 개량한복 입고 살고 싶다는 말을 하는(ㅎㅎㅎ), 까페를 가도 한옥카페 같은 델 좋아하는 남편 취향처럼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압화 소주잔이 딱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또 괜히 샀다가 잔소리할 것 같아 혹시 몰라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진짜, 진짜~ 사지마~ 알았지?” 하는 남편. 그치만 하나에 4000원, 에이 몰라 하며 몰래 사버렸다. 몇 분 후 남편을 만나 짜잔! 하고 소주잔이 담긴 종이가방을 꺼냈다. 그러자 사 온 사람 생각 않고 역시나, “여보~ 내가 사지 말라했잖아~” 하며 전전긍긍하는 그. 그런데 가방에서 소주잔을 꺼내 뽁뽁이까지 풀어헤쳐 보여주니 유심~히 보더니 웬걸, 이거 어디서 샀냐고, 몇 개 더 살 수 있냐며 빨리 그 가게 다시 가자고 한다.ㅎㅎㅎㅎㅎㅎㅎ 순간 어이 없었는데, 간만에 남편이 뭔가 ‘물건’을 사서 좋아하는 걸 정말 오랜만에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다행히 아직 부스가 문 닫기 전이었고, 남편은 찬찬히 고르더니 소주잔을 3개 더 샀다. 사지말라고~ 사지말라고 ~ 하더니 오히려 더 사버린 남편도 멋쩍은지 씨익 웃는다.
소주잔 4개에 세상 다 가진 것처럼 너무 행복해보이는 남편.
‘계획들’ 좀 내려놓고, 옷도 좀 사러 가고, 여행도 좀 다니면 좋으련만. 내가 가끔 친구들이랑 여행가는 것처럼 여보도 어디 좀 여행가라할 때마다 “나중에”라는 말만 하고 일과 육아만 하며 사는 것 같은 남편. 너무 스스로를 힘들게 하며 사는 것 같은 이 사람에게 늘 잔소리를 하는 나지만, 돈에 무지하고 대책 없고 즉흥적인 성격의 나는 남편 덕분에, 자기 거는 안 사고 나와 아이한테 다 쓰는 남편 덕분에 사실 우리 집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나도 결혼 후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잘 사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가~끔은 너무 비싸지 않은 선에서 남편이 좋아할만한 아이템들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고 싶다. 제2의, 제3의 ‘압화소주잔’을 찾아봐야겠다. 또, 쳇바퀴같은은 일상 안에서 의무와 책임을 1순위로 두고 사는 이 남자, 짬날 때마다 손잡고 가까운 어디로든 자주 데리고 나가줘야겠다.
24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