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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준 Jun 04. 2021

인생은 기묘하게 흐른다

돌아가며, 경험하며 알게 된 일.


핫한 책 <어린이의 세계>를 읽고 있다. 어린이 독서교실을 운영하는 작가분의 이야기를 읽으며 몇 년 전 아이들과 일했던 때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인생은, 미래는 아무도 몰라, 내 경우가 딱 그랬다. 당시 잘 다니던 도서관 사서 일을 그만두고 어디에 홀린 듯 독서토론교사 일이 하고 싶어졌다. 사서일이 계약직이긴 했지만 코앞에 무기계약 전환을 앞두고 있던 터였다. 그만둔다는 얘기에 퇴근 후 주임님, 계장님 번갈아가며 밥을 사주시며 정식 공무원은 아니어도 이 자리도 쉽게 오는 기회 아닌데, 왜 그만두냐, 너무 아깝다, 은준씨가 지금은 어려서 잘 모를수도 있지만 나중에 생각하면 계속 다니길 잘했다 싶을거야.. 등의 얘기를 해주시며 퇴사를 만류했다. 그때는 무언가에 씌였을까, 망설임이 없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만류하고 조언을 해도 내 뜻은 확고했다.

   
책이 좋아 사서가 되었지만 책을 구입하고, 전산에 등록하고, 이용자에게 책을 건네며, 각종 책 관련 행사를 열고.. 참 뿌듯하고 의미있는 일들이지만 그 땐 책 안의 ‘텍스트를 다루는 일’이 너무 하고팠다. 어떤 방식으로든 책 내용을 다루는 일에 갈증이 컸다. 데스크에 앉아 도서관을 순환시키게 하는 업무도 좋았지만 독서 관련 강의를 하러 오시는 강사님들을 보면 너무 부러워 하루하루 근무하는 게 고역인 상태까지 이르렀다.

예전부터 가르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어릴 땐 성적도 별로에다 용기도 열정도 그닥 없어 내가 그냥 할 수 있는 무리 없을 일을 골라 직장에 다니곤 했었다. 그런데 가르치는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내 깊은 어딘가에 묻힌 채 꺼내줘,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한번은 해봐야할 대상이 되어.

그렇게 나는 비록 월급은 많지 않아도 정년이 보장되는 도서관 사서 자리를 내 발로 차고 독서지도교사가 되었다. 그토록 하고팠던 일, 어땠을까.
독서토론을 진행하고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 내게는 30 정도의 즐거움, 70 정도의 괴로움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이 일을 하면 이러이러할거야, 나의 성향은 이러이러하고, 이 일은 이러이러하니 결과는 이러이러할거야.‘ 사람은 하기 전엔 절대 모르나보다. 어렴풋이 짐작가는 결과가 있더라도 해봐야하는 게 또 나란 사람인가보다.
일을 하며 아이들 때문에 찡한 순간도, 마음에 라일락이 피는 듯이 따뜻한 순간들도 많았다. 새삼 어린이 청소년 책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돌기도, 머리 한 대 맞은 듯 큰 삶의 철학을 마주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해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어린이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는 말을 쉽게, 아프게 하는 어린이들을 상대하는 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사람을 이끌어 나가는 일을 좋아하지도 않고 소질도 없다는 것을. 카리스마도 리더십도 부족하다는 것을. 남에게 싫은 소리하는 것은 특히나 싫어한다는 것을. 또 일로써 읽는 거 말고 책은 그냥, 읽고 싶은 것을 읽고 싶어한다는 것을. 비문이 아니라면 아이들의 글에 이렇다 저렇다 하고 싶어하지 않아한다는 것을.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그냥 ’내가 그것들을 하는 걸‘ 더 재밌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능력이 더 좋았으면 더 재미를 느끼며 일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이 어려우니 더 재미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버거웠다. 학부모들 상대하는 것도, 내가 모르는 걸 물어보는 아이를 대하는 것도. 동료 선생님은 그럴 때 “몰라~ 니가 찾아봐~”한다고 했다. 나는 그게 안됐다. 하나라도 더 모르지 않으려, 더 잘 가르치고 싶어 주말에도 수업준비에 시간을 들이는데도, 그래도 힘에 부쳤다.

1년 반동안의 경험 이후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왔다. 쉽게 오지 않는 무기계약직 자리를 한번 놓쳤기에 그 후에는 몇 군데 도서관을 전전하며 임신 초기까지 일을 했다. 내 발로 차버린 그 자리엔 새로 면접 보고 온 사서분이 얼마 있다 바로 무기계약직이 되었다. 무기계약 예산은 잡혀버렸기에 누군가는 그 자리에 앉아야만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었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경험해 본 뒤에 그 도서관에서 일을 하게 되고, 무기계약 전환 제안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할 것도 없이 오케이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흐르지가 않는다. 타이밍이 참 얄궂다싶지만 어쩌겠나. 아마 계장님, 주임님들의 말을 듣고 계속 사서일을 하며 무기계약직이 되었더라도 나는 그만두고 독서지도 일을 해보았을 사람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다시 돌아간다면 일을 그만두지 않은 채 휴무날 알바로 가르치는 경험을 해봤으면 참 좋았을 테지만, 20대의 어린 나는 그런 지혜도 융통성도 없었다. 아니, 그만큼 이것저것 잴 틈도 없이 안정보다는 하고픈 것, 욕망에 지독히도 충실하도록 순수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걸 잘하고 덜 잘하고,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기 위해.. 머리로는 어쩌면 이미 알던 그것들을 몸으로 깨닫기 위해 나는 아주 비싼 기회비용을 치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값을 치르지 않았으면 나는 영영 몰랐을 것이다.
덕분에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 그것도 책으로 소통하고 가르치는 일. 그 일들에 이젠 미련이 없다. 또 밋밋하다 싶던 도서관 일이 다시 좋아졌고 더 애정을 갖고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때 가르쳤던 7살은 이제 고학년이 되었을 테고, 중학생 친구들은 벌써 스무살이 다 되었겠다. 그 친구들 얼굴이 한번씩 생각난다. 친구들과 함께한 추억과 경험의 시간 덕분에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한번 잘 알게 됐다.
인생은 기묘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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