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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준 Mar 18. 2020

그놈의 자존감

세상 유일한 각자의 색깔로,




■ 1. 자존감을 필요로 했던 나




한동안, 자존감이라는 감정은 내 삶의 큰 화두였다.

자존감이 높았으면 했다. 예민하고 쉽게 상처받기 잘 하는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나마 버텨내려면 자존감이라는, 튼튼한 마음의 무기라도 있어야할 것만 같았다. 자존감이란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자신을 존중해주는 거니까, 자존감이 튼튼하면 다른 이에게 사랑과 인정을 굳이 갈구할 필요 없이 홀로 굳건히 설 수 있겠다, 싶었다. 타인을 바꿀 순 없으니 내 마음이라도 스스로 지켜내고 싶었다.


내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기에 자존감이라는 감정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상대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올 때 내가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 남에 의해 내 기분과 감정이 좌지우지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자존감 높이는 법, 자존감 관련된 글귀나 강연 등을 많이 찾아 봤다. 자존감 높아 보이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그들에게서 자극을 받기도 했다. 그런 노력들은 당시엔 나름대로 도움이 됐다. 때때로 좋은 책이나 글귀를 통해 반짝하고 희망에 차기도, 순간적으로 자존감이 올라가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들을 통해 근본적으로 내 자존감이 높아졌느냐 묻는다면, 내 대답은 ‘no'다.


자존감은 책이나 강연, 글귀 등으로 높아지는 게 아니었다. 진정으로 자존감을 높이는 것, 인생을 바꾸는 것은 타인의 글과 말만으로는 부족했다.

사람이, 삶이 바뀐다는 건 머리와 생각으로만 되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자존감을 높이려는 노력을 그만두었고 점점 머릿속은 이런 생각으로 바뀌어갔다.


‘자존감.. 억지로 높이려하지 않아도 돼’


자존감을 그렇게도 높이고 싶었던 나는 왜 이젠 굳이 자존감을 높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을까. ‘자존감 높이기’는 왜 이젠 내게 매력의 대상이 아닐까.




■ 2. 자존감 높이려 할수록 나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아이러니



자존감이 낮은 것보단 물론 높은 것이 좋다.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은 중요하며 그런 상태로 나아가는 태도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문제는 자존감을 높이려다보면 자칫 자존감을 높여야한다는 생각, 강박 때문에 노력의 출발시점부터 자신을 낮게 보거나 부정하기 쉽고,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에 비해 현재의 자신은 미흡한 상태, 미완의 상태라 생각하기 쉬웠다.


분명 자존감이라는 것은 자신을 존중하는 감정인데, 그 자기존중으로 가기 위한 과정 안에서 자꾸만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오히려 자존감이 더 떨어진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러면서 점점, 이런 쪽으로 생각이 옮아갔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칠 정도의 낮은 자존감이 아니라면, 각자 자신이 가진 만큼의 자존감으로 그냥 살아도 되지 않을까?'




■ 3.나도 모르게 내 낮은 자존감이 상대의 무례함을 정당화 시키는데 이용될 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인간관계 안에서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이나 말로 상처 혹은 피해를 입을 때가 있는데 내 자존감이 너무 낮고 자존감을 높여야한다는 생각이 강하면 잘못한 상대를 비난해야할 때조차도 스스로를 자책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저 사람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왜 저렇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쉽게 하지?’

같은 생각을 하다 이내

‘그런데 혹시, 내가 자존감이 낮아서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자존감을 더 키워서 저 사람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다잡아야겠어.'와 같은 식으로 사고 회로가 흘러갈 때가 있었다.

이 사고흐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자존감을 키워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덜 받기 위해 노력하려는 태도와 상대방의 잘잘못 여부는 따로따로 분리해서 생각해야하는데 그게 점점 힘들어졌다.


자존감을 키우려다 결과적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면죄부를 주고 내 낮은 자존감이 오히려 상대의 무례함을 정당화 시키는데 이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황정은 작가의 ‘복경’이라는 단편 속 주인공은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판매직원인데, 주인공을 관리하는 매니저는 고객응대에 능수능란한 여자로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자기야, 나는 무시당하는 쪽도 나쁘다고 생각해.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지. 존귀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나 진정으로 당하는 거야 무시를” .....

_ 황정은 <복경> 202 p.


때로 자존감을 이상한 쪽으로(?) 맹신, 해석하는 이들은 소설 속 매니저와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네 안이 단단하면 남들 말에 쉽게 상처받지 않아. 사람들, 사회가 내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할 때, 자존감을 튼튼히 해서, 즉 방어막을 두껍게 튼튼하게 쌓아서 스스로를 지켜야지, 남들에게 상처받는 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기 때문인거야, 니 자존감을 높여야해...” 와 같은 논리로.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다음의 공식이 성립된다.


무시당하는 것 = 자존감이 낮기 때문 =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

∴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 = 무시받는 사람의 탓


상처를 주고 무시를 하는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와 무시를 받는 사람이 잘못이라는 논리.

‘힘이 없으니 무시를 당하는거야.’..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사실 현실은 저들의 논리대로 돌아갈 때가 많다. 내가 힘이 없으면 무시받기 쉽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착각한다. 무시받기 쉽다는 것과 무시 받아 마땅하다는 말을 같은 말이라고.


그 매니저의 말처럼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길줄 아는 사람은 살면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까, 어떤 상처도 받지 않을까.

‘자존감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를 탓하기에 앞서 내 마음만 잘 돌보면 되는 걸까. 무슨 일에서건 툭툭 털고 혼자 해결해버리는 것만이 진짜 자존감이 높은 걸까?





■ 4. 이제 그만 생긴대로 살고 싶다



내가 자존감을 높이는 노력을 그만둔 이유 또 하나는, 자존감 높이는 일보다 나라는 사람, 자존감이 낮으면 낮은대로 나 생겨먹은대로 사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점점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자존감이라는 개념이 뜨면서 언젠가부터 자신의 감정을 많이 드러내고 표현하는 사람은 감정이 여리고 멘탈이 단단치 않은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씌어지는 것 같았다. 쉽게 반응하고, 내 감정을 표출하면 속이 훤히 보이는 사람, 유리심장, 유리멘탈로 불리기 쉬운 거였다. 남이 무언가 상처 주는, 기분 나쁜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기분 나쁜 걸 티 내고, 하소연을 하면 자존감이 흔들리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흔했다. 그러다보니 그런 사람으로 인식되는 게 싫어 점점 내 기분을 드러내는 일에 조금씩 주저하게 됐던 것 같다. 내 감정을 한껏 솔직하게 드러냈다가 남들이 나를 쉽게 판단하는 게 싫고 두려워 괜찮은 척, 단단한 척, 무심한 척, 적당히 가면을 쓰며 지낸 날도 많았다. 실은 내 속은 너무너무 복잡한데,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작은 행동, 작은 말 하나 하는 것도 수차례 고민하면서..

안타깝게도 요즘 시대가 멋지다고 말하는 인간상과 내 성향은 많이 달랐다.

내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의 이미지는 이성적이고, 멘탈이 튼튼하고, 중심이 있는, 어떤 일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나라는 사람은 감정에 호소하기 잘하고, 또 쉽게 발끈하고, 예민하고, 생각많고, 이리저리 많이 흔들리는 인간.

이런 내 타고난 성격이 아닌 ‘자존감이 단단한 사람’이 되고파 그런 류의 사람들을 찾고, 자극 받고 싶어하고, 따라하려 한 적도 많았다.


그리고 점점 나를 잃어갔다. 내 본연의 기질들을 스스로 낮게, 좋지 않게 바라본 시간만큼 나만이 갖고 있는 색깔, 고유한 향은 조금씩 사라졌던 것 같다. ‘현재의 나’가 아닌 어떤 ‘이상적인 나’가 되고 싶어 하면서 점점 나는 없어졌고 대신 언젠가부터 그 자리에 우울한 내가 서 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가만히 내 맘을 들여다봤다. 나의 감정적인 면, 생각이 많은 면, 예민한 면, 이런 기질들, 나쁜 걸까.

생각해보면 기질, 성격이란 건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그냥 성향의 문제였다. 그저 각각의 색깔일 뿐이었다. 한동안 우울한 시간 속에 빠질 만큼 빠져 지내고 보니 자존감도, 뭣도 다 귀찮고 이젠 그냥 생겨먹은 대로 본성대로 살고 싶어졌다. 자연스럽게. 자존감이라는 게 그리 높지 않은 나여도 그냥 내 색깔 그대로. (때로는 바닥을 찍는 경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잘못된 게 아니고, 남에게 피해주는 게 아니라면. 그냥 다 생겨먹은 대로. 감성적인 나, 솔직한 나.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나, 당황하는 나, 속이 훤히 비치는 나. 그냥 이런 나 그대로 인정해주고 싶어졌다. 이제 그만 나 자신을 바꿔야할 대상, 한없이 성장시켜야 할 존재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현재의 나’로 살고 싶어졌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자존감이라는 감정은 나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됐다.



■ 5. 진짜 자존감 높이기 :

자존감,꼭 높여야하는 건 아냐,

자존감에서 벗어나니 자존감이 높아지는 느낌



‘자존감, 꼭 높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상하게 이 말이, 자존감을 키워 행복해지자는 말보다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내 존재는 늘 건재하다는 생각, 이 생각들이 무수한 자존감 관련 얘기들보다 오히려 더 힘나게 했다.

이제는 자존감을 높이려는 노력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존감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자존감이 조금씩 생기는 느낌이 든다.


내가 취업을 못해도, 돈이 많지 않아도, 외모가 특출나지 않아도, 아픈 곳이 있어도, 친구가 많이 없어도 . 뭐 어떨까. 남들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이젠 내 자존감이 높은지 낮은지에 크게 관심이 없다. 더 중요한 건 내 색깔대로 나답게 살고 있느냐는 것.


꼭 자존감을 높이려한다면 한 가지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삶을 통해’ 높아지는 것이다. 삶을 진짜 바뀌게 하는 건 삶 자체다. 경험만이, 내 삶만이 나를 키운다.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으려 노력했던 내가 얻어낸 결론, 이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


자존감을 높이고 싶어 노력한 사람 중에 아마 실제로 자존감이 높아진 사람도 간혹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나처럼 글 읽고 이야기 듣는 정도의 수동적인 노력에 그쳤던 사람이 아니라 작은 무엇이라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행동을 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자존감 높이는 일이 나쁜 일이며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억지로, 인위적으로 높이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자존감은 분명 살아가는 데에 필요하며, 중요한 감정이다. 하지만 그 자존감을 높이려 정작 나를 존중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나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기를. 자존감이 그리 높지 않아도 우리 모두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는 사람들이 되기를. 


자존감으로 고민이 많았던 나의 이야기가 나와 비슷한 이들에게도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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