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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준 Mar 18. 2020

외로움, 우울, 사람 그리고 책



작년 봄. 일을 잠시 쉬며 실업급여 받으면서 집에서 서너달 논 적이 있었다.

신혼집이 꽤 멀리 자리잡게 돼서 안그래도 별로 많지 않은 친구들은 자주 보지도 못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다들 이제 각자 살기 바빠서 못 보는 것도 있고, 서른 중반 즈음 다다르니 인간관계가 확 좁아지는 게 점점 느껴지곤 했었다.


그 즈음 사실 많이 외로웠다.

다정하고 사랑 많은 신랑과 매일 함께 보내는 것과 별개로, 외로웠다. 나는 연인, 가족 뿐만 아니라 그 외의 관계들도 적당히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땐 내 주변엔 거의 아무도 없었다. 친한 친구들한테 전화도 하고, 보자 말하고 그래도 될텐데, 이상하게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러고 싶지가 않아진다.


 어렸을 때는 내 마음이 60, 70이고 상대가 40, 30 이어도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어른이 되면 마음의 크기가 얼추 비슷비슷하지 않음을 느끼면 선뜻 계속 손내밀기가 멋쩍고 힘에 부쳐버린다. 차라리 외로운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랑 출근 후 낮에 잠깐 수퍼 간다고 혼자 집을 나선 어느 날이 지금도 기억난다. 날이 유난히도 맑고 해가 굉장히 뜨겁던 날이었다. 손으로 해를 가리며 수퍼를 향해 걸어가는데, 순간 마음이 너무 공허하면서 무겁고 또 무료하면서 외롭고 온갖 복합적인 감정이 확 밀려왔었다. 그 감정이 강하게 밀려오는 반면에 난 너무 무력한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때 아마 경미한 우울증을 겪은 게 아니었나 싶다.

너무 사람을 안 만나고 신랑 퇴근하기 전까지 계속 혼자 집에 있다보니, 이래선 안되겠다, 꼭 친한 사람 아니더라도 '그냥 사람'이라도 만나야겠다 싶어 그때부터 이것저것 복지회관 같은 곳에 수업을 신청하기 시작했다. 시간 보내는 명목으로 요리, 제빵, 피아노, 커피를 배웠다. 사실 독학으로도 하려면 할 수 있는 것들인데도 돈과 시간을 들여 배우러 나간 건 사람의 온기가 필요해서였다.
결과는 꽤 좋았다. 어떤 특별한 친분을 쌓는 게 아니어도 그저 사람들 사이에 지낸다는 느낌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약간의 활력이 됐다.

참 신기했다. 원래 혼자있는 걸 좋아하고, 혼밥도 잘하고, 혼자 이것저것 잘 하면서 노는데, 그래서 '심심함'이란 감정을 거의 느끼지 않고 살았는데, 그땐 그리도 심심했었다. 사람들 사이에 속해있다는 안정감, 소속감.. 그런 것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을까.

그렇게 난 무료함, 공허함을 이기기 위해 그야말로 몇달간 '취미부자'로 살았다. 오븐도 사고, 피아노도 샀다.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쓰는 돈은 아끼지 않았다. 이것저것 많이 했는데, 그래도 제일 좋은 게 뭐였을까. 젤루 좋은 건 책읽기였다. 베이킹도 재밌고 피아노 연주도 좋고 실용성 좋은 요리도 좋지만 그래도 책이 최고였다. 그냥.. 책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 사는 얘기가 있었고, 사람 사는 모습이 있었다. 나같은 사람도 있었고, 내 주변 사람과 닮은 사람도 있었다. 그냥 책읽고 있을 때 제일 덜 외로웠다.


그냥 오늘, 그 때 생각이 났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책이.. 재미만 주는 게 아니라 진짜 말없이 묵직하게 위로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 마음 맞는 사람과의 대화가 제일 좋지만 그 담으로는 책이 내겐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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