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 <홍동백서> 감상문
가족이란 천 피스 퍼즐을 맞추기처럼 어렵다
가족이란 천 피스 퍼즐을 맞추기처럼 어렵다. 집이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굵직한 명절, 집안의 대소사 등 긴 시간을 함께 하면서도 정작 서로를 다 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부모님은 애정과 헌신으로 자식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칠 것처럼 말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친구나 타인보다도 더 멀게 느껴진다. 가끔은 '널 위해서야.'라는 말이 족쇄처럼 느껴져 거리를 두고 싶기도 하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며, 태어나기 위해 자신의 온 세계인 알을 부순다.'고 한다.
나는 그 알이 부모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자식이 독립할 때까지 부모는 자식을 성장시키기 위해 안전한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알 속에만 있다면 우리가 진정 어떤 새인지 알 수 없다. 내가 나를 알려면, 우리는 안전한 알을 부수고 나와야 한다. 그러나 알에서 나온다는 건 위험하고 불확실한 세계로 가는 것이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운 건 당연하다. 부모가 걸어오며 검증된 길을 걷어차고, 나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그래서 <홍동백서>의 준영은 위태롭다.
정장에 넥타이, 일렬로 나열돼 붙여진 마그넷, 구역별로 깔끔하게 정리된 냉장고. 홍동백서, 조율이시를 읊조리며 제사상을 차리는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다. 곁에서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그의 일상은 그의 집만큼 단정할 거 같다. 그러나 어머니 은숙과 함께 있는 그는 불안하고 위태롭다.
사별한 남편의 제사를 위해 독립한 아들의 집에 찾아온 은숙은 비밀번호를 알고 있음에도 벨을 누른다. 반응이 없자 벨을 누르는 간격이 짧아지고 급기야 문을 쿵쿵 두드리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온다. 문을 두드리던 조급함과 달리,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의 태도는 사뭇 고상하다. 문을 재빨리 열지 않은 준영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준영과 안부를 나누고 제사를 지낸다. 품위 있고 교양 있으며 요즘 자식들을 존중해주는 어머니처럼 보인다. 그러나 준영과 식사를 하며 은숙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처럼 선을 넘는다.
꿈은 생계를 해결한 사람들이나 꾸는 거야.
은숙의 뜻대로 작가의 꿈을 접고 서울에서 교사를 하는 준영에게, 이제는 부동산을 마련하고 결혼을 준비할 때라느니, 누구처럼 취미로 작가를 하라느니 준영이 지금의 자리를 발판 삼아 더 나아가기를 바란다. 준영은 예전에 자신이 꿈을 좇을 때는 반대하던 은숙의 소리에 기가 찬 듯이 딴지를 건다. 준영의 딴지에 은숙은 달래듯 말한다.
“꿈은 생계를 해결한 사람들이나 꾸는 거야.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생계를 해결해야지. 주어진 거 열심히 하면서.”
남편 없이 준영과 누나를 키우느라 사진을 좋아하던 은숙은 꿈을 가슴 한편에 접어놓았을 것이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하자고. 그리고 자신이 그랬듯이 준영 또한 그러길 바란다. 단단한 둥지를 만든 뒤, 생계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를. 하지만 은숙의 말에 준영은 어딘가 불편한 듯 넥타이를 고쳐 맨다.
이윽고 “엄마 나 사직서 냈어.”라는 준영의 말과 함께 주전자의 물이 끓는다. 주전자 끓는 소리가 정적을 찢으며 준영의 본심도 터져 나온다. 앞으로 뭘 하고 살 거냐고 다그치는 은숙에게 준영은 공허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이제껏 은숙이 그려준 대로, 은숙의 시행착오를 보완한 길을 걸어온 준영은 그 길을 걷는 것도 힘들었다고 호소한다. 은숙이 “공허? 배부른 소리 하네.”하자 “이제껏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먹지도 못했네. 다 엄마가 주는 것만 먹었지.”하는 준영의 얼굴에 쓴웃음이 비친다.
평행선을 걷는 ‘우리’
준영과 은숙은 닮았지만 평행선을 걷는다. 사진, 글과 같은 예술적 취향을 즐기면서도 현실적으로 교사를 한다. 하지만 꿈에 대해서만큼은 생각이 다르다. 은숙은 은숙의 입장에서 그 길을 걸어봤기 때문에, 그리고 준영은 그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에. ‘꿈은 생계를 해결한 사람들이나 꾸는 거야.’라는 말은 은숙이 본인을 다독였을 말이다. 그러나 준영은 은숙이 아니다. 준영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준영이다. 사직서를 내기까지, 준영 또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신이 아니고서는 준영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아프락사스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이다. 명암이 분명하지 않고 절대적 선악을 정의할 수 없는 이중성의 신이 아프락사스다. 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은 생존을 향한 본능이자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이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무모한 인간의 충동과 본능이 향하는 곳은 결국 어디로 갈까?
중력에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
지금의 시대는 부모님 세대처럼 학업, 취직, 결혼과 출산으로 순탄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 인생의 불확실성에 맞서며 산다. 솟구치는 물가와 부동산 가격, 보장되지 않는 정년.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 다가옴과 동시에 지구 온난화와 기후 위기, 식량 전쟁으로 불행이 예견되는 미래. 우리 모두 불확실한 미래를 끌어안고 저마다 행복해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런 시대에서 어느 정도 안정성이 보장됐었던 기성세대의 조언이 더는 요즘의 MZ세대에게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준영과 은숙은 닮았음에도 평행선을 따라 달릴 수밖에 없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중력보다 위로 떠오르려는 양력이 더 커야 한다고 한다. 공기를 가르며 나아가는 새의 날개는 가벼우면서도 힘차야 한다. 중력에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 준영을 비롯한 우리 청춘네 삶이 그런 게 아닐까?
완전하지도 곧은 직선도 아니지만 저마다 각자의 선택을 통해 점과 점을 이으며 나아간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지만 꼭 나와 타인의 선을 비교할 필요가 있을까? 점찍으며 나아가고 때로는 제자리를 도는 삶에서도 내 삶의 의의와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그거면 됐다. 언젠가 우리 모두 바라는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