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3. 프라도 미술관의 「시녀들」
마드리드의 중심가를 둘러본 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프라도 미술관을 찾았다. 이 미술관은 1819년, 펠리페 4세가 세상을 떠난 해의 11월에 개관했다. 초기에는 주로 왕실 소장품인 15세기 작품들을 중심으로 전시되었고, 이후 50여 년이 지나 이사벨라 2세 때 국유화되면서 현재는 만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문자 언니는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바로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인 <시녀들(Las Meninas)> 앞이었다.
이 작품은 단연 프라도 미술관의 최고 걸작으로, 서양회화의 정점이라 평가받는다. 프랑스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스페인에는 <시녀들> 있다며 스페인 사람들은 이 그림을 무한한 자부심으로 여긴다.
캔버스 크기만 해도 가로, 세로 약 3미터에 달하는 대작이다. 감상 위치는 그림에서 7~1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이 가장 좋다고 하여, 많은 관람객이 자연스럽게 그 거리에서 작품을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었다.
그림의 중심은 당시 다섯 살이던 마르가리타 공주와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시녀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왼쪽 배경에 화가 자신인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커다란 캔버스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뒷배경에는 왕과 왕비의 초상화처럼 보이는 액자도 걸려있는데, 실제로는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벽에 걸린 거울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그 거울에는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대상, 즉 펠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아나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이 독특한 구도 덕분에 <시녀들>은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선, 깊은 이야기와 해석의 층을 가진 그림으로 평가된다. 화가는 왕과 왕비의 모습을 그리는 중이었고, 그 순간 어린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화실에 불쑥 들어온 장면이 담겨 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공주를 응시하는 시녀들의 시선과 자세, 그리고 그림 전체에 흐르는 긴장감은 극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의 총애를 받으며 오랜 기간 궁정화가로 활동했다. 그는 단지 왕족의 외모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본질과 존재의 깊이를 탐구하며 유럽 회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는 공주의 성장에 따라 여러 차례 그려졌으며, 그 일부는 정치적 이유로 오스트리아나 프랑스로 보내지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스페인을 넘어 전 유럽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후대의 수많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와 고야, 마네와 달리까지—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수백 년 동안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벨라스케스 외에도 고야의 <옷을 입은 마하>, 보슈의 <쾌락의 정원> 등 인상 깊은 명작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엘 그레코, 루벤스, 보티첼리, 카라바조, 뒤러, 렘브란트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어, 서양미술사의 흐름이 한눈에 펼쳐지는 공간이었다.
미술작품 감상을 좋아한다고 자부하던 내가, 정작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스를 잘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이제 그의 예술 혼은 내 안에서 반짝일 것이다.
4. 터줏대감 나 선생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승용차는 그라나다를 행해 달렸다.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 차 안에서는 고향의 '전설의 명곡'이 울려 퍼졌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들판과 어우러진 낮은 산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따라 자라난 나무들은 모두 올리브였다. 몇 시간을 달려도 끝없이 펼쳐지는 올리브 나무들. 전 세계 올리브 생산량의 44퍼센트가 이 긴 산등성이에서 나온다고 한다. 저녁 무렵에 스페인 최남단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이곳은 안달루시아 지방의 독특한 문화를 간직한 도시다.
그라나다 중심가로 들어섰다. 구 도시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도로가 일방통행이라 좁은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아야 했다. 약속 장소에는 한국인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를 ‘형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모시던, 더 형님 같은 사람. 그를 ‘나 선생’이라 불렀다. 그는 이 지역의 터줏대감이자, 불경기를 모르고 사는 보기 드문 한국인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펜션은 4층짜리 건물로, 방이 10여 개 있었다. 내부는 흰 대리석으로 단정하게 꾸며져 있었고, 뒤편에는 또 다른 건물도 소유하고 있었다. 아래층은 레스토랑, 2층은 살림집, 3층과 4층은 ‘펜션’ 간판을 달고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인터넷 광고를 통해 한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날부터 작은 레스토랑에는 ‘CLOSED’ 팻말이 걸렸다. 그의 스페인 아내와 아들, 딸이 서빙을 맡아 우리를 위한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다. 식탁에는 매 끼니마다 찐 올리브 열매가 애피타이저로 올랐다. 짭짤하고 고소한 별미였다.
황홀한 식탁이 펼쳐졌다. 노란 밥 빠에야, 돈가스와 비슷한 밀라네사, 내가 좋아하는 올리브에 끓인 새우 요리 '깜바스', 하몽, 로모, 토마토와 오이로 만든 가스파초, 와인과 과일로 만든 칵테일 샹그리아까지...
스페인에서는 식사 자체가 하나의 문화였다. 밤 9시에 시작한 저녁 식사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다.
5. 병아리 감별사의 청혼이야기
45년 전, 나 선생은 스물한 살의 청년으로 유럽 땅을 밟았다. 병아리 감별사라는 직업으로. 여러 나라를 떠돌다 결국 그라나다에 정착했다. 당시 이 직업은 일본인이 주로 했고, 그는 일본에서 기술을 배운 삼촌에게 전수받았다. 땀 흘려 노동하지 않아도 자립할 수 있는 기술직이라 수입도 괜찮았다. 생활은 안정됐지만, 한국 여성이 없던 시절이라 그는 오랜 세월을 노총각으로 지냈다.
그가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가슴에 품고 있던 미모의 처녀에게 반지를 선물했다. 유리 반지쯤으로 생각하고 별 반응 없던 그녀. 하지만 아버지가 그 반지의 진가를 알아보고 귀띔해 준 덕분에 그녀는 그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그 다이아몬드 반지는 사랑을 이루는 열쇠가 되었다.
열여덟 살의 스페인 처녀와 결혼해 두 아들과 딸을 두었다. 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 속에서, 첫사랑에 빠졌던 젊은 시절의 나 선생이 겹쳐 보였다. 국적은 스페인이지만, 그는 가족 안에서도 외모가 다른 이방인이었다.
연세 대 근처가 고향이라는 그는 몇 해 전, 자녀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 지금은 아이들도 한국 관광객을 만나면 한국말을 더듬더듬 말할 수 있다.
식당은 어느새 이민자의 밤으로 그간 쌓인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낸 이민자들의 저물어가는 인생길은 한 편의 소설이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 얼굴 너머로 외로움이 어른거렸다. 그의 아내는 현재 초기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의 장편소설이 해피앤딩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3부에서 계속
글쓴이 소개
필명: 국화 리
숙명여고와 서울교육대학 졸업.
1982년 미주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한의사로 활동(산타모니카) 한의학 박사
2006년 미주『문학세계』로 등단
2010년 서울 『한국산문』으로 재등단
2025년 수필집 『사랑을 말하고 싶은 날』출간
미주문인협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이사
현재 로스앤젤레스 피오피코 도서관 후원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