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6. 아람브라 궁전
나 선생은 새벽부터 줄을 서 오후 2시 티켓을 구해왔다. 1,000명만 입장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궁전으로 올라가는 길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이었다. 좁은 언덕길을 따라 20분쯤 택시를 타고 올라갔다. ‘아람브라 회상’의 애절한 기타 선율로 자라온 내 마음속 그리움. 입구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궁전 아닌가.
건물은 은은한 크림색에서 자스민 향이 피어오를 것 같은 섬세한 아름다움. 수많은 가녀린 기둥들은 마치 사슴의 다리처럼, 아니 학의 다리처럼 기품이 있었다. 망사로 덮은 듯한 아련한 벽면에는 수천 개의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우유로 목욕한 여인이 수를 놓은 뒤, 선녀가 되어 승천하는 모습 같았다. 이슬람 문화가 이렇게 여성적이라면, 전쟁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대칭으로 심어진 나무 사이를 걸으며 나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쟁을 떠올렸다. 같은 믿음의 조상을 둔 두 종교. 나는 아직 이슬람 경전을 읽은 적은 없지만,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며 ‘살롬’을 인사말로 나눈다. 반면 ‘사랑’을 말하는 기독교는 십자군 전쟁을 일삼았다. 사랑의 종교 기독교와 평화의 종교 이슬람의 싸움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우리를 아프게 한다.
아랍인들이 혼을 담아 만든 이 궁전을 떠나며 흘렸을 눈물은, 네바다 설산에서 흘러내린 궁안의 물길과 함께 아직도 흐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새겨놓은 예술의 울림은 ‘아람브라의 회상’과 함께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7. 플라멩코의 밤
어둠이 내려앉자, 우리는 플라멩코 공연장을 찾았다. 그라나다 구시가지의 집시 마을 산등성이. 좁고 촘촘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간 끝에 전망 좋은 저택의 뜰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바처럼 꾸며진 공간에 백여 명의 관객이 빽빽이 들어찼다.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유래한 춤(Baile), 노래(Cante)와 기타(Guitarra) 세 파트로 구성된 민속예술이다. 주로 집시들과 가난한 하류층 민들의 애환이 담긴 춤이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집시들의 아랍풍 노래와 기타 선율.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혼을 부르는 듯한 춤사위는 우리나라 무당의 춤을 연상케 했다. 집시의 춤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불덩이 같았다. 눈빛, 손끝, 발굽 소리까지 모든 것이 절박하고 격정적이었다. 마치 살아온 시간들을 불꽃으로 토해내는 듯했다.
전에 발셀로나를 방문했을 때는 넓은 바에서 공연을 한 뒤 무용수들은 관객을 몇 명 무대로 데리고 올라가서 함께 춤을 추었다. 그때는 나도 뽑혀서 그들 따라 춤추는 흉내를 내며 즐거웠다. 이번엔 빨간 원피스를 차려입고 참석했지만 장소가 좁아서 구경만 하며 좀 섭섭했다. 맥주 한 잔으로 달아오른 가슴을 식히며 공연장을 나섰다.
한밤중, 건너편 언덕 위의 아람브라 궁전은 황금빛 노을처럼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붉은 흙으로 구워지었기에 ‘아람브라(붉은) 궁전’이라 불리는 것이다.
낮에는 찬란했던 그 자태가 밤에는 말없는 서사처럼 다가왔다. 시간의 무게를 머금은 성벽이 달빛에 젖어, 마치 이방인의 눈물마저 품어주는 듯했다.
그 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불타는 듯한 플라멩코의 리듬과 고요한 궁전의 그림자가 뒤섞인 밤공기 속에서.
그라나다 여행 중에는 몇몇 한국인 관광객도 만났다. 방학을 맞아 여행 중인 대학생들, 플라멩코를 배우러 온 여성, 신혼여행을 즐기던 예쁜 커플. 훤칠하고 멋진 한국 청년들을 보며, 나는 그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얼굴이라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뿌듯해졌다.
다음 유적지로 떠나며, 나 선생 가족과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그도 아내와 함께 북유럽 크루즈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8. 태극 문양의 대문 앞에서
스페인으로 간 오빠는 태권도 도장을 열었다. 그는 인상이 좋았고 체격도 균형이 잡혔다. 그의 태권도는 스페인의 황실 식구들과 정·재계 인사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훗날 ‘마스터 킴’으로 존경받게 되었다. 많은 태권도 사범들이 이민을 와 성업을 이루었고, 스페인에 태권도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스페인의 터줏대감이 된 그는 한인 평통위원이 되었고, 한국 문화를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마스터 킴은 태권도 꿈나무를 키우는 학교를 세워 스페인 전역에 한국 태권도를 보급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둔 교외의 넓은 부지를 방문했다. 입구의 큰 철문이 우릴 맞이했다. 철문 중앙에는 큼직한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들풀만 무성한 넓은 들판에는 미래의 태권도 학교를 위한 청사진이 있었다.
인생은 계획대로만 달려가지 않는다. 운이 따라줘야 한다. 스페인의 경기가 오랫동안 침체되면서 그의 공사 계획은 지연되었고,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점점 노쇠해져 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과연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9. 여행을 마치며
스페인은 연간 8,500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 대국이다. 지중해성 기후로 온화하고, 푸근한 인심도 인상 깊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도 사람들은 편안하고 여유로움이 있었다.
로마 제국의 점령지였기에 곳곳에 그 유적지가 남아있다. 로마인들은 길을 닦고,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로를 건설했다. 콜로세움도 그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800여 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는 아랍 문명과의 공존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남아있다. 스페인은 이슬람과 유럽 문화가 함께 숨 쉬는 특별한 장소다.
성당과 화려한 궁궐이 많아, 한때 세계를 제패하던 스페인의 영광을 짐작하게 한다.
이곳을 방문하기 7~8년 전, 바르셀로나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건축의 명장 가우디의 작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방문했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아침마다 라테 한 잔과 함께 먹는 식사는 잊을 수 없다. 미국에 오래 살았지만, 나는 커피 체질이 아니어서 주로 계피 생강차를 즐겼다. 하지만 앞으로는 아침을 라테 한 잔으로 시작하게 될 것 같다.
이번 여행은 이산가족의 상봉이기도 했다. 제원 오빠와 문자 언니의 삶의 터전을 직접 돌아보았다. 제원 오빠와 문자 언니의 삶의 터전을 직접 돌아보며 그들의 삶을 만나 보았다.
제원 오빠의 태권도 도장에 도배되어 있던 수많은 상패와 감사패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의 피와 땀이 새겨진 문신 같은 흔적들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빌었다.
여행 후, 3년쯤 지나 오빠는 갑자기 세상을 떴다. 평생의 사업을 이루지 못한 남자의 한을 안고 갔을 것이다. 그의 꿈은 누가 이루어 줄 수 있을 것인가?
글쓴이 소개
필명: 국화 리
숙명여고와 서울교육대학 졸업.
1982년 미주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한의사로 활동(산타모니카) 한의학 박사
2006년 미주『문학세계』로 등단
2010년 서울 『한국산문』으로 재등단
2025년 수필집 『사랑을 말하고 싶은 날』출간
미주문인협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이사
현재 로스앤젤레스 피오피코 도서관 후원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