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프롤로그]
‘독일은 누구인가’의 물음을 가지고
베를린에서 시작한 여정은 남쪽으로 내려가 뮌헨을 거쳐, 서북쪽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무리되었다.
베를린 장벽을 걸으며 분단의 상처를 되새겼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재편했던 포츠담 선언의 현장을 찾았다. 라이프치히에서는 통일의 불씨가 된 시민 혁명의 숨결을 느꼈다.
문학의 도시 바이마르에서는 괴테와 실러를 만났고, 다카 후 수용소의 참상을 보았다.
예술의 도시 뮌헨에서 전혜린과 이미륵을 만났고. 실러의 고향 마르바흐, 튀빙겐으로
가서 헬만 헤세의 고향 칼브로, 횔더린.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아치형 다리 아래 흐르던 그들의 지성.
칼 마르크스의 고향 트리어, 베토벤의 생가 본, 라인강변을 따라 전설의 고향 ‘로렐라이 언덕’,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무대인 베츨라르, 괴테의 생가 프랑크푸르트에서 그의 성장과정을 보았다. 괴테의 나라 독일, 그들의 지성을 키운 원동력을 찾아서 19개의 도시를 돌아보는 대 장정이었다
끔찍한 현대사를 치른 독일은 지구의 이상 국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전쟁 없이 민족통일을 이룬 독일을 방문하여 ‘독일은 누구인가.’ 배우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문명은 때로 전쟁을 일으키고, 때로 그 상처를 감추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정이 끝날 무렵,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힘, 그것이 문명을 인간답게 만드는 시작이라는 것을.
1. 자유의 도시, 베를린에서
독일 하면 우리는 먼저 베를린을 떠올리며 친숙함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장면 때문일 것이다.
그 뒤에 겹쳐지는 것은 우리 민족의 슬프고 부끄러운 역사, 이른바 ‘동백림 간첩사건’이다. 1967년, 반공을 국시로 삼던 박정희 정권은 ‘독일 간첩단’이라며 재독 유학생과 교민들을 대거 소환해 법정에 세웠다.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실형을 살았고, 이응로 화백, 피아니스트 백건우, 배우 윤정희 부부까지 거론되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기의 사건은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 독일이 탄생한 그 감격이야말로 베를린을 더욱 특별한 도시로 만든다.
전쟁 없이 민족 통일을 이룬 그 역사적 현장, 베를린은 우리 한민족에게도 언젠가 올 통일의 꿈을 보여준 도시다.
독일 통일을 이룬 그들은 누구였을까.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다. 수도 베를린 역시 동독 안에 있었지만, 도시는 동서로 나뉘었다. 해가 갈수록 많은 동베를린 주민들이 자유로운 삶을 찾아 서 베를린으로 넘어가자, 이를 막기 위해 동독 정권은 서 베를린을 둘러싸는 장벽 155km를 쌓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동독 땅 한가운데에 섬처럼 고립된 서 베를린이 생겨났다. 바로 그 장벽이 무너진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가슴이 뛰었다. 버스는 한 광장에서 멈췄고, 길 건너로 화려한 색채의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베를린 장벽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정겹기까지 한 그 담장은, 마치 덕수궁 돌담길을 연상케 했다.
우리가 상상하던 삼팔선의 모습—잡초 우거지고 철조망과 지뢰밭으로 둘러싸인 살벌한 경계선—과는 너무도 달랐다.
수천 년을 함께 살아온 한 민족이 하루아침에 강대국의 손에 의해 둘로 갈라지고 원수가 된 한반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두 이념은, 결국 인간이 지구에서 어떻게 더 존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두고 벌어진 실험이었다. 냉전이 끝난 오늘날에도, 한반도는 체제 유지를 위해 동족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다. 국민은 굶주리는데, 체제라는 허깨비를 붙들고 있는 북한.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재이다.
베를린 장벽은 수백 미터 남짓, 그 벽은 이제 화가들의 손에 의해 현대 회화 전시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의 삼팔선도 언젠가는 이처럼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시민들의 쉼터이자 공연장이며 관광 명소가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버스는 분단되었던 베를린 시내를 가로질렀다. 통일 이후 동독 지역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동서 베를린의 거리에는 차이가 느껴졌다. 두 체제가 남긴 문화적, 경제적 격차 때문일 것이다.
독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도착했다. 이 문을 지나면 구동독 지역이다. 통일 전에는 우리나라의 판문점처럼 접근이 제한되었던 곳이지만, 이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오간다.
보리수 가로수를 따라 이어진 길 너머로, 위풍당당한 유리 돔의 연방의사당이 보였다. 우리는 곧장 피히테와 헤겔이 교수로 재직했던 베를린 [훔볼트 대학]으로 향했다. 근대 대학의 효시로 꼽히는 이 대학은 181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시절 훔볼트에 의해 세워졌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과 쇼펜하우어, 헤겔, 피히테, 엥겔스, 마르크스 등 쟁쟁한 사상가들이 이곳에서 교수나 학생으로 머물렀다.
특히 프러시아가 나폴레옹에게 침략당했을 당시, 피히테는 이 대학 강당에서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명연설로 민족의 결속을 호소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며 독일 통일의 정신이 이 대학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음을 되새겼다.
이후 우리는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을 찾았다. 손기정, 남승룡 두 선수의 이름이 새겨진 그곳, 전망대에 올라 베를린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보불전쟁의 전승기념탑이 솟아 있고, 도시 곳곳에는 반듯한 현대식 건물과 푸른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베를린은 2차 세계대전 중 도시의 80%가 파괴되었지만, 역사적인 건물들은 거의 모
두 복원되었다. 구동독 지역 개발도 활발히 이루어져 구 서독 지역처럼 상권이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현재 350만 명이 거주하는 베를린. 분단 28년 만에 이룬 통일도 벌써 2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많은 구동독 주민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해 고생하고 있고, 구 서독 주민들 또한 막대한 통일 비용으로 인해 삶의 부담이 크다고 한다.
민족의 통일은 이루었지만, 통일의 후유증은 아직 진행형이다.
한반도 분단 70여 년, 통일을 위해 지금 준비하더라도 수십 년은 걸릴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글쓴이 소개
필명: 국화 리
숙명여고와 서울교육대학 졸업.
1982년 미주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한의사로 활동(산타모니카) 한의학 박사
2006년 미주『문학세계』로 등단
2010년 서울 『한국산문』으로 재등단
2025년 수필집 『사랑을 말하고 싶은 날』출간
미주문인협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이사
현재 로스앤젤레스 피오피코 도서관 후원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