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2. 포츠담 선언, 포츠담을 찾아서
포츠담은 독일 동북부에 위치한 부란덴부르크주의 주도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상수시 궁전과 체칠리엔 호프 궁전을 품고 있다. 그중 체칠리엔 호프 궁전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 수뇌들이 독일의 국토 분할과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를 논의했던 '포츠담 회담'의 현장이다.
이 회담의 결과로 공포된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 항복을 요구했으며, 일본은 결국 원자폭탄 투하 후 이를 수락했다. 우리 민족에게는 36년 일제 치하에서 해방을 안겨준 역사적 선언이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짧았고, 우리는 곧 6.25 전쟁을 겪으며 분단의 길로 들어섰다. 포츠담 선언은 해방의 문을 열었지만, 그 이면엔 분단의 씨앗도 함께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35km 떨어진 포츠담. 버스는 도시를 벗어나 숲이 우거진 일방통행로를 따라 달렸다. 평지 위에 펼쳐진 조용한 숲길, 곧게 뻗은 나무들이 하늘로 닿고 있었다. 인공 구조물 하나 없이 온전히 자연만이 흐르는 그 길은, 정신이 탁해질 때면 산소처럼 맑은 휴식이 될 것 같았다. 오롯이 숲의 품에 안겨 몇 시간을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길, 자연을 삶의 일부로 삼은 독일인의 안목이 엿보였다.
30여 분 후, 체칠리엔 호프 궁전에 도착했다. 입구엔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와 체칠리 왕비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귀족 시인처럼 섬세한 인상의 그는 1차 대전 패망 후 네덜란드에 망명하여 생을 마쳤다고 한다. 히틀러는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의 고종과 순종을 떠올리게 하는 몰락의 운명이다.
소박한 궁전, 그러나 이곳은 세계사를 뒤흔든 회담의 중심지였다. 미·영·소 정상들이 국토 재편을 두고 치열한 수싸움을 벌였던 방. 붉은 천이 깔린 원탁 테이블과 그 위에 놓인 세 나라의 국기들.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지만,
역사는 여전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동행한 강만길 교수는 팔순의 나이에도 또렷한 목소리로 분단의 현대사를 들려주었다. 일제 강점기 임시정부의 외로운 외침, 해방 후 강대국 사이에서 좌우로 찢긴 민족, 신탁통치 반대와 통일 염원 속에 무력 충돌로 번졌던 6.25 전쟁. 분단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원치 않으며 북한을 떠받치고 있다.
교수는 “민족통일에 앞서 문화 통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프러시아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만든 상수시 궁전. 계단식 정원과 시원한 분수, 왕권의 상징이 된 이 화려한 궁전을 거닐었지만, 내 마음은 무거웠다.
포츠담 선언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왔지만, 곧이어 찾아온 전쟁과 분단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수많은 가족을 갈라놓았다. 그 비극의 시대를 살아낸 이들은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기억하는 세대마저 사라지면, 그날의 고통과 절규도 사라지는 것일까.
그러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죽은 자는 죽어서도 말하게 하라.
3. 라이프치히 / 독일 통일의 불씨가 된 곳
라이프치히는 작센 주에 속한 비교적 큰 도시다. 12세기부터 교역이 활발해지며 도시로 성장했고, 1408년에 설립된 라이프치히 대학과 바흐가 봉사한 성토마스 교회,
독일 통일의 불씨가 된 니콜라이 교회를 품고 있다.
구동독 지역, 독일 중동부에 위치한 상업 중심지다.
라이프치히 중심가에 들어섰다. 도로는 좁고, 5층 안팎의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선 구도심은 정겹다.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라이프치히 대학은 지금은 도로변에 현대식 고층 건물로 확장돼 시대의 변화를 보여준다. 괴테, 니체, 바그너, 슈만 같은 거장을 배출한 대학이며, 동독 시절엔 ‘칼 마르크스 대학’으로 불렸다. 600년 역사의 전통 대학은 독일이 교육으로 세운 나라임을 실감하게 한다.
성토마스 교회. 바흐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간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며 매주 새로운 곡을 작곡해 연주했던 곳이다. 2000년 7월 28일, 그의 서거 250주년을 기념해 대대적인 복원이 이뤄졌고, 그의 묘소도 교회 안으로 옮겨졌다. 새로 설치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앞에서 발길이 멈춘다. 건반을 누비던 바흐의 손, <토카타와 푸가>의 웅장한 선율이 가슴을 울리는 듯하다. 교회를 나서며도 그 울림은 길게 따라 나왔다. 바흐의 동상 앞에서 섰다. 그의 뒤를 이은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 멘델스존, 슈만, 바그너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오늘의 목적지는 성 니콜라이 교회였다. 라이프치히 대학 근처, 1165년에 세워진 이 교회는 동서 유럽과 남북 유럽을 잇는 통상로의 교차점에 건립되어 상인들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고 한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예배당으로 바뀌었고, 바흐가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며 주요 작품을 초연했던 시기에 절정을 맞았다.
1980년대 초, 이곳에서는 매년 11월 평화를 위한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열흘간 젊은이들이 모여 기도했고, 이후 매주 월요일 오후 5시마다 ‘평화 기도회’가 열렸다. 환경오염과 빈부격차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한 기도회는 점차 인권 침해와 체제 비판으로 확장됐다. 서독에서는 군비 확장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고, 동독의 니콜라이 교회는 통일을 기도하며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결국 불법 모임으로 간주되어 경찰이 교회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1989년 10월 9일, 기도회를 마친 2천여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비폭력’으로 저항했고, 이 움직임은 마침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성 니콜라이 교회가 품었던 힘, 그 폭발력은 독일 역사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 역사를 따라가며 한 가지 교훈을 얻는다.
니콜라이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개혁 교회였다. 면죄부를 팔던 교회, 라틴어 성경을 독점하던 교회에서, 신도중심의 교회로 나아가 사회 참여에 기여했던 것이다.
오늘의 한국 개신교는 어떤가. 100년의 역사 속에서 대한민국의 밤하늘은 빨간 십자가 불빛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중세 교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복신앙에 매달린 채, 하나님을 상품처럼 팔며, 교회의 개혁을 두려워한다. 사회 참여를 금기시하는 풍토. 우리의 현실이다.
라이프치히! 루터의 종교개혁 450주년, 동독 건국 40주년을 기념하던 1989년 10월 7일. 그리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10월 9일—독일 통일의 기폭제가 된 날.
라이프치히 대학이 위대한 작가와 철학자, 음악가를 배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정신이야말로 체제의 벽을 넘어, 민족의 통일을 가능하게 한 저력이 아니었을까.
(3부에서 계속)
글쓴이 소개
필명: 국화 리
숙명여고와 서울교육대학 졸업.
1982년 미주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한의사로 활동(산타모니카) 한의학 박사
2006년 미주『문학세계』로 등단
2010년 서울 『한국산문』으로 재등단
2025년 수필집 『사랑을 말하고 싶은 날』출간
미주문인협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이사
현재 로스앤젤레스 피오피코 도서관 후원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