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4. 니체의 고향, 뢰켄으로
니체. 그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으로 유럽 문명의 몰락을 예고한 철학자였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비극의 탄생』 같은 저서들을 통해 그는 인류에게 날카로운 통찰과 사유의 선물을 남겼다.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초를 닦은 그의 삶과 철학을 떠올리며, 그가 태어난 고향 뢰켄을 찾았다.
이번 독일 여행을 통해 니체의 성장 배경과 철학의 근원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백여 년, 니체가 죽였다고 선언했던 그 신은 과연 영원히 눈을 감았을까.
라이프치히를 떠나 30여 분 만에, 우리는 한적한 시골마을 뢰켄에 도착했다.
들판이 펼쳐진 마을 한가운데, 작은 교회가 서 있었다. 30~40명 정도가 예배를 드렸을 법한 소박한 규모였다.
니체의 아버지는 이 교회의 목사였고, 니체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우리 일행을 맞이한 건 키가 크고 듬직한 남자였는데, 현재 이 교회의 목사로, 니체 가족이 살았던 교회 부속 건물에 거주 중이라고 했다.
교회 마당으로 들어서자 사람 크기의 흰 석고상 세 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단정한 복장의 자그마한 여인과 듬직한 남성이 나란히 서 있다. 처음엔 부부 같았지만, 알고 보니 어머니와 아들, 니체였다. 그 곁에는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조각상이 있었다.
벌거벗은 남성이 모자로 민망한 부위를 가린 채 서 있었는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텅 빈 눈은 보는 이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덮고, 부실해 보이는 하체에는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말년의 니체, 두통과 정신 착란으로 일그러졌던 그의 초상이었다.
못생긴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는 누이 엘리자벳의 말처럼, 그의 모습은 지금은 하얀 천사로 서 있었다.
교회 건물 벽 쪽에는 니체 가족의 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부모님, 누이 엘리자벳, 그리고 니체의 묘다. 기념관은 과거 마구간이나 창고로 쓰이던 공간을 개조한 것으로, 어린 니체의 사진과 가족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섯 살에 그는 사랑하던 아버지가 뇌질환으로 쓰러지는 장면을 보았고, 동생이 죽는 꿈을 꾼 후 실제로 동생을 잃었다.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 앞에서 침묵한 ‘사랑하는 하느님’. 어린 니체가 받았을 상처는 그의 철학의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 후 가족은 교회를 떠나 할머니 집으로 옮겨갔고, 니체는 여성 친척들 틈에서 성장했다. 14세에 이미 50편의 시를 썼고, 작곡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 무렵부터 기독교에 대한 회의가 일기 속에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한 권의 책과 한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음악가 바그너.
24세에 바젤 대학의 최연소 고전문헌학 교수가 된 그는, 지병으로 인해 10년 후 교수직을 내려놓고 요양과 집필에 전념하게 된다.
그 무렵, 그는 생애의 열병 같은 사랑을 겪는다. 지적 감수성과 미모로 유명했던 루살로메. 니체는 그녀와의 결혼을 원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다.
“아, 내가 어찌 영원을 갈망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반지 중의 반지인 결혼반지, 회귀의 둥근 고리를… 나는 단 한 번도 내 아이를 낳고 싶은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 영원이여!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일곱 개의 봉인」에서 반복되어 노래처럼 울려 퍼진다. 임헌영교수는 루 살로메에게 보낸 그의 연애편지는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학사의 명문장으로 꼽는다고 힘을 주었다.
누이 엘리자벳은 루 살로메를 질투할 만큼 니체를 사랑했다. 말년에 정신질환을 앓던 오빠를 바이마르로 옮겨 돌보았고, 1900년, 56세에 임종을 지켰다. 이후 그는 오빠의 저서를 모아 니체 도서관을 설립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부 철학은 누이의 정치적 성향에 의해 왜곡되기도 했다.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다. 꼬마 니체가 눈을 꼭 감고 하나님과 속삭이던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목사에게 물었다. “신을 부정했던 니체를, 교회는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습니까?” 목사는 짧게 대답했다. “기독교는 니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이것이야말로 독일 정신의 일면이라 생각했다.
니체는 교회의 절대 신성과 기독교적 도덕이 지배하던 시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독교는 오히려 니체를 다시 조명하기 시작한다.
그가 공격한 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역사적 본질이 아니라, 왜곡되고 형식화된 허구였다는 반성이 그것이다.
교리는 잃었지만 본질은 지키고자 했던 기독교의 자각이 시작된 것이다.
니체는 기존의 진리를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 했던 시대의 풍운아였다. 20세기 유럽의 정신은 신으로부터 내려와 인간의 실존으로 향했다. 지금 유럽의 웅장한 교회들은 더 이상 믿음의 장소가 아니라, 박물관이 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가 ‘죽였다’ 던 신은 이제 한국으로 옮겨 와 오히려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아이러니한 풍경이다. 그러나 그 신은 결코 영원히 죽을 수 없다.
누군가 그를 필요로 하는 곳, 지구 곳곳에서 그를 다시 부를 것이다.
니체가 어머니와 함께 오래도록 살았던 나움부르크에는 니체 박물관이 있다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들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잠든 뢰켄은 조용했고, 그가 말한 초인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땅처럼 느껴졌다.
5. 바이마르 – 괴테와 실러를 찾아서
바이마르는 독일 중부, 구동독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9세기부터 도시 형성이 시작되었다. 18세기에는 독일 고전주의 문화의 꽃을 피우며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특히 괴테가 살았고, 실러와 우정을 나눈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괴테 국립박물관, 여름 전원주택, 괴테와 실러의 묘소, 실러 생가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조식 후, 괴테가 교수로 재직했던 예나를 출발해 30여 분 만에 바이마르에 도착했다. 도시 중심부의 독일 국립극장 앞에는 괴테와 실러의 청동 기념비가 우뚝 서 있었다. 괴테는 월계관을, 실러는 두루마리 작품을 들고 서 있는 당당한 모습이다. 두 인물은 바이마르와 독일 고전 문화의 상징으로, 전 세계의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바이마르 공국의 공작 아우구스틴은 괴테의 재능에 매료되어, 26세의 괴테를 7살 연하인 왕의 측근으로 초청했다.
괴테는 이곳을 문화 도시로 만들고자 했고, 유명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와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도 이곳으로 초청했다.
비록 바흐는 후에 라이프치히로 옮겼지만, 그의 후손들은 당대의 유력한 음악가로 성장했다.
인구가 늘고 문화의 중심지가 된 바이마르에는, 공작이 하사한 저택에서 살았던 괴테의 집이 국립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의 생가 못지않은 궁전 같은 이 저택에는 6,500권의 장서가 전시되어 있다. 괴테는 이곳에서 16세 연하의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는 공원을 걷다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600통이 넘는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공작과 아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그는, 결국 이 집에서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괴테의 여름 전원주택은 크지는 않았지만,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산책로가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살롯테 폰 슈타인 부인과 자주 만나 연정을 나누던 장소이기도 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티브가 되었던 그녀는 이미 결혼하여 일곱 자녀를 둔 여인이었다. 괴테는 그녀와 약 10년 동안 1,6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어느 날 갑자기 괴테는 이탈리아로 떠났고, 귀국 후에는 크리스티아네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배신감을 느낀 슈타인 부인은 자신이 보낸 편지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녀의 묘소에 들러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세기의 천재 괴테와 함께 기억되는 여인이 되었으니, 지금쯤은 평온하지 않을까.
괴테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친구이자 후배인 프리드리히 실러이다. 실러는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고, 시와 희곡을 집필하며 문학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괴테보다 10년 연하였지만, 괴테는 그를 예나 대학의 교수로 추천했고, 함께 희곡을 집필하거나 그의 작품을 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실러는 『빌헬름 텔』로, 그리고 그의 시 「환희의 송가」는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의 합창곡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괴테는 먼저 세상을 떠난 실러를 깊이 그리워했고, 자신도 실러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의 바람대로 두 사람은 바이마르 궁정 묘지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생전 수많은 여성 편력이 있었지만, 괴테의 진정한 연인은 실러가 아니었을까.
도심의 타운홀 광장을 걸으며 상인들의 노점도 구경했다. 괴테가 머물렀다는 엘레판트 호텔 입구에 서서, 그 시절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20세기에 들어와 프로이센 왕국이 몰락하고,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이 수립되었다. 독일 최초의 민주 헌법인 '바이마르 헌법'이 이곳에서 제정되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바이마르는 또 다른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이 도시는 문화와 정치, 혁신과 파괴가 공존하는 역사적 무대가 되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배경이 된 기념관. 사랑에 실패한 청년 예루살렘이 권총 자살한 사건은, 괴테의 손에서 불멸의 소설로 환생했다. 그의 죽음이 후대에 영광으로 기억되다니, 자살마저 누가 이야기로 엮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베츨라어에서 첫사랑 슈타인 부인을 만나 사랑을 경험했고,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바이마르에서는 실러를 만나 문학의 황금기를 열었다.
이 도시에는 독일인의 살아 있는 전설, 괴테가 여전히 숨 쉬고 있다.
4부에서 계속
글쓴이 소개
필명: 국화 리
숙명여고와 서울교육대학 졸업.
1982년 미주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한의사로 활동(산타모니카) 한의학 박사
2006년 미주『문학세계』로 등단
2010년 서울 『한국산문』으로 재등단
2025년 수필집 『사랑을 말하고 싶은 날』출간
미주문인협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이사
현재 로스앤젤레스 피오피코 도서관 후원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