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국화리의 기행수필 <독일 인문학 기행>

by 국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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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6. 히틀러의 다하우 수용소


바이마르를 떠나 약 4시간을 달려 남쪽의 뉘른베르크에 도착했다.

히틀러 일당을 심판한 전범 재판소가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그러나 이날은 문이 닫혀 있었다.

그곳을 뒤로하고 독일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뮌헨으로 향했다. 다하우 수용소를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의 잔혹한 죄악과 수많은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일은 후대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하우 수용소는 독일 남부에 위치한, 나치 정권 하의 최초 강제 수용소이다. 유대인

강제수용과 종족 말살의 현장이었다.


헐벗은 벌판에 들어서자 한쪽에 위치한 박물관과 기록 영상이 그 참혹했던 시대를 보여준다. 그 앞에는 유대인의 뼈로 뒤엉킨 듯한 울부짖음이 형상화된 대형 조각상이 막사를 향해 서 있었다. 지금은 몇 개의 막사만 남기고 대부분이 허물어진 넓은 빈터를 걸었다. 양쪽에 늘어선 건물들은 마치 도살을 앞둔 가축들의 집합소 같았다. 그 길 위에서, 굶주림과 공포에 떨던 영혼들이 엎드려 흐느끼는 듯한 환영이 떠올랐다. 깊숙이 걸어 들어가자 허름한 창고 같은 건물이 나타났다.


굶주린 유대인들을 산 채로 태우던 화장터였다. 방 안은 빨간 눈물방울이 튄 듯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원한은 바닥과 벽, 천장, 그리고 불구덩이까지 짙게 배어 있었다.


그 주위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탑과 기도소가 세워져 있어, 방문자들이 그 넋을 위로할 수 있도록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는 수 겁의 세월을 두고도 속죄를 다 할 수 없는 멍에를 짊어진다.

히틀러는 1차 대전 패망과 세계 대공황을 틈타 독일을 구원할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그는 금융권을 장악한 유대인을 악의 축으로 몰아 말살 계획을 세우고, 1941년부터 점령지마다 수용소를 건설해 유대인을 가두고 학살하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 퍼진 수용소 중 폴란드의 아우슈비츠가 그 상징으로 기억된다. 그곳에서 4년간 자행된 대학살, 그 희생자 수는 약 600만 명에 달한다.

1945년 연합군의 승리로 전쟁은 끝났지만, 이 지성과 이성의 나라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잔학상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 시절, 많은 독일의 지성인과 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미국과 스위스 등지로 망명했고, 히틀러에 저항했던 사람들 중에는 순교자도 있었다.


그중 나는 청년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를 기억한다.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인물 명단에 포함되어 수감되었고, “미친 자가 차를 인도로 몰고 있다면, 그를 끌어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교회에 남기고, 1945년 4월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유언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그는 지금도 살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라고 여겨진다.

전후 세상은 달라졌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은 영화와 문학으로 이어져 감동을 전하고 있다. 영화로는『쉰들러 리스트』,『라이프 이즈 뷰티풀』,『피아니스트』 등이 있어 진한 아픔과 연민으로 그들의 넋을 기린다, 문학작품으로는 엘리 위젤의 『밤』이 깊은 울림으로 떨게 한다.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 600만 명이 죽어갈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던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해답을 기다린다.


재일동포 서경석 작가의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도 내 가슴 깊이 남아있다. 그는 박정희 정권 하에 고문과 수감생활을 겪은 형제의 가족사와, 홀로 살아남아 지옥 같은 수용소를 증언한 이탈리아 유대인 쁘리모 레비의 삶을 포개어 작품으로 남겼다. 레비는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와 같은 생존자들이 짊어진 고통은 너무도 무거웠다.

우리 민족 또한 일제 식민 치하에서 저항하다 죽음을 맞은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이참상의 현장을 직접 보고 나니 그 고통의 깊이가 다르게 다가온다. 약소민족의 설움과 가해자의 잔혹함이 더욱 절절하다.

시시포스가 산을 오르며 큰 돌을 굴리는 신화를 떠올린다. 살아남은 자에게 역사는 그런 무게를 지운다.


말틴 루터, 괴테,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헤세, 하이네, 헤겔, 피히테, 브레히트, 마르크스…… 독일은 인류사에 찬란한 정신적 유산을 남겼다. 그런데 그 나라가 한 광기의 지도자에 의해 십수 년 간 유린되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오, 하나님.

펜은 휘두르는 칼 앞에 쓰러질지언정,

결국엔 진실의 승리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7. 전혜린의 대명사, 뮌헨


독일 남부에 위치한 뮌헨은 자연환경이 빼어나고 규모도 큰 편이다. 12세기의 바이에른 왕국의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생동감 넘치는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서울 법대 재학생이었던 전혜린. 6·25 동란이 끝난 후 그녀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뮌헨에서 헬만 헤세, 루이제 린저 등 여러 작품을 번역하며 한국 젊은이들의 우상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나도 그녀의 저서를 읽기 시작하며 그녀를 따라 검은색 옷을 자주 입은 기억이 난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립운동가이자 독일에서 생을 마감한 이 미륵의 일대기를 소개했다. 뮌헨은 우리에게 그녀의 대명사처럼 기억되는 도시다.


그녀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는 슈바빙 거리, 카페, 가스등, 자유, 청춘, 모험, 예술이 담겨 있다. 전혜린의 영혼이 숨 쉬는 도시,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 낭만을 꿈꾸게 하는 공간이다.


전혜린이 다녔던 뮌헨대학교 주변을 나는 천천히 걸었다. 늦은 오전, 더위가 있었지만 길가는 차분했다. 4~5층 석조건물들이 견고하게 늘어서 있었고, 거리도 깔끔했다. 그녀가 수필에서 묘사했던 분위기를 찾고자 슈바빙 거리를 걸었다. 그러나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그녀가 매일 지나던 개선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내가 잘못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람도 차량도 드물어 쓸쓸하기까지 했는데, 그날이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숲이 좋은 산책로를 따라 공원을 걸었다. 그녀가 자주 사색에 잠겼던 길일 것이다.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아 예술가들의 향기가 살아 있는 슈바빙 거리에 며칠 머물고 싶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시청사가 있는 마리엔 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관광객들로 북적였고, 시장 바닥처럼 활기가 넘쳤다. 고색창연한 구 시청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정오가 되자 시계탑 위 인형들이 돌아가는 종탑을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았다. 나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뒤로한 채 인파를 피해 상가를 거닐었다. 노천카페와 음식점에는 점심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고도시의 상가를 걷는 기분은 여유롭고 정겨웠다.


전통을 자랑한다는 500년 된 레스토랑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미국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전통의 향기가 짙게 풍기는 곳이었다.


생맥주와 함께 흐르는 생음악 속에서 돼지고기 스테이크를 즐기며, 전혜린이 사랑했던 이 거리를 되새겼다.

이후 그레펠핑 시로 가 이 미륵의 묘소를 찾았다.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한 공동묘지는 마치 작은 공원 같았다. 독일의 고급 주택가에는 공동묘지가 인접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묘지를 자기 집 꽃밭처럼 가꾸며, 죽은 자와 산 자가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이 미륵(1899–1950)의 묘는 비교적 큰 검은 대리석 비석 위에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신 박사님께서는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하시고 반일 시위를 하다 일경에게 쫓겨 1920년 독일에 오셨다.


이후 30년간 독일에서 생활하며 『압록강은 흐른다』 등 여러 저서를 통해 동서 문화의 교량 역할을 하셨다. (후략)


이 미륵, 본명 이의경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맹자, 중용, 소동파의 시 등을 줄줄 외우는 천재였다고 한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항일운동에 가담하다가 일경을 피해 독일로 망명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의 본고장으로 동경해 온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946년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출간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뮌헨대학교(1947~1949년)에서 한국어, 중국문학, 동양사를 강의하며 독일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소설은 독일 중등교육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반나치주의자였던 뮌헨대 총장 후버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전혜린이 뮌헨으로 유학한 것은 그가 작고한 지 몇 년 뒤였지만, 그의 명성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작품을 번역해 한국에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미륵은 생전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에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은 1963년 그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 했다.

한국이 낳은 두 천재의 삶의 자취를 따라 방문한 뮌헨.

전혜린은 31세라는 짧은 나이에 생을 마쳤고, 이 미륵은 56세로 생을 마감했다. 비록 그들의 생애는 짧았지만, 그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은 세월과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들의 영혼이 스며든 이곳 뮌헨은 우리 민족에게도 잊지 못할 의미 있는 도시로 남아있다.



글쓴이 소개

필명: 국화 리

숙명여고와 서울교육대학 졸업.

1982년 미주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한의사로 활동(산타모니카) 한의학 박사

2006년 미주『문학세계』로 등단

2010년 서울 『한국산문』으로 재등단

2025년 수필집 『사랑을 말하고 싶은 날』출간

미주문인협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이사

현재 로스앤젤레스 피오피코 도서관 후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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