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1. 상봉/비바 꼬리아나
국화리
마드리드행 비행기는 정시에 착륙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내에서 내리는 순간, 곡선형 천장이 펼쳐진 공항 내부가 눈앞에 들어왔다. 수천 개의 대나무 판을 늘어놓은 듯한 천장 아래, 반듯한 대리석 바닥이 길게 이어졌다.
짐을 찾아 대합실로 내려가자마자, 시선은 빛의 속도로 사람들 사이를 훑었다.
인기 씨 부부와 함께 짐을 찾은 뒤, 그리움의 손짓이 눈에 들어왔다. 문자 언니 부부와 다른 일행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50여 년 만에 마주하는 제원 오빠. 뉴욕에서 온 길자 부부까지 합세해, 다섯 가족의 포옹으로 공항 대합실은 뜨거워졌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대학을 막 졸업한 문자 언니가 이민을 간다는 것이다. 청파동의 넓은 마당이 있던 한옥집을 두고 그들은 떠났다. 나는 그 이별이 서운했다.
이대 앞의 언니와 함께 걸었던 그 길은 마치 명동처럼 활기찼다. 그녀의 단골 양장점에서 맞춘 겨울 코트, 언니의 연애 이야기로 설레던 기억. 우리는 속내를 보이며 귀속 말을 나누던 사이였다.
이번 여행은 마드리드에 사는 제원오빠 부부와, 라스팔마스 섬의 문자 언니 부부의 초대로 시작되었다. 미국 독립기념일 연휴(237회)를 맞아 뉴욕의 친동생 길자 부부, LA의 사촌 인기부부가 함께 의기투합했다. 나는 그들과 가까운 팔촌이다. 여행의 디렉터인 제원오빠는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칠순의 미남이었다.
공항을 나서자 곧 마드리드 중심지로 향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흥분이 감돌았다. 유럽 축구 결승전이 저녁 9시에 열릴 예정이었다. 경제난을 겪고 있는 두 나라,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 곳곳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은 현대기업의 업적이라 했다.
시청을 지나 대사관 건물이 밀집한 지역에 도착했다. 주거와 상업이 뒤섞인 4~5층의 견고한 건물들이 프랑스와 영국의 도시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제원 오빠의 집도 그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40여 년 전 구입한 아파트는 호텔처럼 깔끔했다. 대리석 계단과 짙은 나무 벽이 고풍스러웠고, 작은 엘리베이터는 유럽식 건물 특유의 절제된 미감을 보여줬다. 마룻바닥은 정사각형 나무 조각들이 맞물려 예술작품 같았다.
공간은 작았다. 미국의 넓은 주택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곳 유럽인들의 삶이 새로웠다. 샤워실은 한 사람이 겨우 설 수 있는 크기였다. 아이들이 떠난 뒤 방 하나를 개조해 욕실과 부엌을 넓혔고, 부부는 두 개의 작은 방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방문객들은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의 한인 마켓에서 공수해 온 선물들을 풀어놓았다. 된장, 고추장, 쌈장, 청수냉면, 멸치, 다시마, 말린 나물들까지. 스페인에서는 귀한 것들이었다. 저녁 만찬은 올케 언니의 손맛이 담긴 한식이었다. 잔이 오가며 상봉의 정이 익어갔다.
1965년, 오빠 가족은 외항선을 타고 제1차 아르헨티나 이민길에 올랐다. 13세대가 함께, 한 달이 넘는 항해를 했다. 선상에서 홍콩을 거쳐, 설렘 가득한 이민자들은 신대륙을 향해 나아 갔다. 그러나 도착지는 뜻밖의 벌판—라마르께 농장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눈물지을 겨를도 아까웠다. 지참금을 아껴 다시 짐을 꾸려 스페인으로 이주했고, 함께 떠났던 13 가구는 각자 흩어졌다.
TV가 폭음을 터뜨렸다. 스페인이 첫 골을 넣은 것이다. 모두가 공중에 떠올랐다.
식사를 마친 후, 올케가 건네준 빨간 티셔츠를 입고 우리는 거리로 나섰다. 마드리드의 중심대로는 에스파뇰의 함성으로 들끓었다. 4:0 완승. 거리의 군중에게 “비바 에스파뇰!”을 외치면, 그들은 “비바 꼬리아나!”로 응답했다.
현대가 설치한 대형 스크린 덕분에, ‘꼬리아나’는 유명인이 되었고, 아시아 이민자들에게도 어깨 펴는 날이 찾아왔다.
마드리드에서의 첫날밤은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미친 듯이 즐긴 밤이었다. 우리도 월드컵 4강 신화의 함성을 다시 떠올리며, 스페인의 경제 위기가 이 승리처럼 물러나기를 바랐다. 이민자의 재회는 활활 타올랐다.
2. 아, 이모님
다음 날 아침, 두 대의 차로 나눠 타고 가족 묘지를 찾았다. 남성들은 오빠의 차에, 여성들은 올케의 차에 나눠 탔다. 마드리드 도심에서 15분 거리. 아담한 공동묘지는 주택가 가까이에 자리했다. 유럽 대부분 국가처럼, 죽은 이들과 가까이 살아가는 삶의 철학이 묻어났다.
인간키만 한 석관과 비석들이 가지런했다. 준비해 간 국화꽃을 바치고, 술을 따르며 한 사람씩 인사를 드렸다. 조카 인기 부부도 함께했다. 조실부모한 인기는 고모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터라, 오래도록 눈물을 훔쳤다.
서울의 중심이었던 광화문 근처, 명동과 무교동, 충무로는 전쟁 후 상권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무교동 술집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와 빈대떡 향이 피어났고, 이모님은 그곳에서 음식점을 운영했다. 내 작은아버지도 남대문 시장에서 미군 물자—카메라와 시계 등을 팔았다. 나는 수송동 중학교 수업을 마치면 광화문으로 향하곤 했다. 이모님의 음식점과 작은아버지의 가게에 들렀다.
마음이 아픈 어머니에게 이모는 안식처 같은 분이었다. 이모가 떠난 뒤, 어머니는 오랫동안 우울했다.
조실부모한 인기 씨는 신부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을 왔다. 초창기에는 햄버거를 굽고, 정원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차곡차곡 모은 자금으로 리커 스토어를 열었고, 건물 투자도 하며 성공을 일궈냈다. 두 아들은 의사로 활동하니 자식농사도 잘 된 편이다.
이모님은 인기 동생 집에서 여러 해를 지내며, 손자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모부는 떠나온 애인을 잊지 못해 한국을 드나들었고, 결국 우리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졌다.
무덤 앞, 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제야 너희들 다 모여 자랑스럽구나.”
이민의 풍파는 잠잠해졌고, 우리도 어느덧 노년을 맞이했다. 먼 타국에 묻힌 이모님을 찾아뵈니, 마음의 빚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이모님은 실향민 1세대로, 황해도 안악에서 내려온 피난민이다. 늘 베푸는 손이 컸고, 친척들의 쉼터가 되어 주었다. 남편의 외도도 감내하며,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둘째 아들을 먼저 보내고, 지병으로 긴 시간을 앓았다.
황해도 안악—이제는 혼이 되어야만 갈 수 있는 곳. 그곳의 기억을 안고, 이모님은 어머니와 함께 계시리라.
“국화야! 너와 함께 갔던 하와이 여행을 네 엄마에게 들려주고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2부에서 계속
글쓴이 소개
필명: 국화 리
숙명여고와 서울교육대학 졸업.
1982년 미주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한의사로 활동(산타모니카) 한의학 박사
2006년 미주『문학세계』로 등단
2010년 서울 『한국산문』으로 재등단
2025년 수필집 『사랑을 말하고 싶은 날』출간
미주문인협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이사
현재 로스앤젤레스 피오피코 도서관 후원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