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나의 금강산 여행일지<금강산, 북녘땅을 밟다>

by 국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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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관동 팔경을 아시나요


모란각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북한 음식 하면 함흥냉면 아니겠는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냉면 국물부터 먼저 맛보았다. 꿩으로 육수를 만들었다는데, 단맛도 신맛도 없는 밍밍한 맛이었다.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아 국수 몇 가닥만 건져 먹다가, 문득 스스로 놀랐다.


손님인 나는 동포의 음식을 대접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은 국물 한 방울까지 마시며 예의를 지켰다.


오후에는 온정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며 고성읍 쪽으로 동해가 보였다. 삼십여 분 후, 낮은 산 중턱에서 버스가 멈췄다.

하늘이 내려와 담긴 듯한 푸른 호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삼일포다.


삼십 육 개나 되는 다양한 산봉우리와 울창한 소나무 숲, 그리고 앞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들판이 어우러져 여유로운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호수 위에는 몇 개의 작은 섬이 떠 있고, 그 소나무 숲 사이에 자리한 작은 정자가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휴게소인 단풍관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일행과 함께 북한 막걸리로 축배를 들고, 조개·멍게·문어를 안주 삼아 풍류를 즐겼다.


거울 속 부용(芙蓉) 같은 삼십육 봉에

하늘과 맞닿은 일만 이천 봉

호수 안에 한 조각 돌섬 있어

바다를 찾는 객과 잠이 들었네.

조선의 한 시인이 읊는 시조에 귀 기울이며 삼일포의 정취에 젖어들었다.


3. 우리는 하나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상설 공연 중인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감상했다. 진달래 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회자가 꽃보다 더 아름답게 등장했다. 북한 특유의 억양에 호소력 넘치는 진한 음성으로 환영 인사를 건넸고, 그 진심은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열다섯,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녀 단원들이 기계체조 같은 묘기를 펼쳤다.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아슬아슬한 곡예를 선보이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애틋하고 슬픈 감정이 스며들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집단훈련 속에서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 어린아이들의 피눈물이 서려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중국 여행 때도 비슷한 공연을 보았지만, 감동보다 가슴 아픔이 더 컸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는 동포애의 정으로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보내고 환호했다. 사회자가,


‘우리는 하나’라는 글을 들고 “우리 다시 만납시다.”라고 마무리 인사를 하자, 객석에서는 모두 눈물을 터뜨렸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중국의 속국으로 끊임없이 수난을 겪었고, 조선 말기에 그 고통이 끝나는가 했더니 또다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쯤 우리 민족은 자주민주주의의 기쁨 속에 한민족으로 다시 함께할 수 있을까. 꿈을 꾸는 민족은 죽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의 고난은 더 위대한 민족으로 태어나기 위한 신의 끈질긴 단련일지도 모른다.


저녁 식사 후 다시 온천장에 들러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금강산 계곡에 울리던 물소리가 금강 교향곡처럼 밤하늘을 울리고 있었다.


4. 금강산 절정


오월의 아침, 눈으로 느껴지는 태양빛이 찬란했다.

짐을 챙겨 호텔을 나와 버스에 실었다. 오후에는 남한으로 내려가는 날이다.


금강산의 진수라는 ‘만물상’ 관광이 남아 있었다. 층암절벽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악미가 절정이라는 곳이다. 천선대, 망양대, 안심대, 절부암, 귀면암, 삼선암, 만상정, 육화암, 관음폭포 등 이름난 곳들이 많았다.


두 시간가량 가파른 등산을 해야 한다니 겁이 났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일행과 멀어지지 않기 위해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산기슭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길을 오르며 자주 뒤돌아 발아래 펼쳐진 거대한 경관을 카메라에 담았다.


긴 행렬을 이루며 오르는 여행객들의 모습은 마치, 금강산 허리에 꽃띠를 두른 듯, 화려하게 산을 장식하는 것 같았다. 우리 또한 금강산의 일부처럼 어디에서든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가파른 산길을 지팡이에 의지해 빠른 걸음으로 오르는 할머니가 있었다. 숨이 찰 만큼 힘든 나에게, 그 노인은 젊었을 때 산을 많이 타서 힘들지 않다고 했다. 나를 앞질러 올라가는 저 할머니, 어떤 사연이 있어 지팡이와 함께 이곳을 찾아야만 했을까.


오를수록 가까워지는 형상들, 만 가지 모양을 한 바위들이었다. 그중 귀신 얼굴 모양이라는 귀면암이 높이 서서 우리를 맞는다. 만물상이라는 이름답게 수없이 다양한 형상의 바위들이 우뚝 서 있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금강산 산신령의 힘으로 올라온 듯, 나는 험준한 산령을 정복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섰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말로 다 그릴 수 없는 감탄 뿐이었다.

비로소 금강산 정상에 도전한 것일까. 어제 보았던 일만 이천 봉우리가 저 멀리서 우리를 향해 깃발을 흔들었다.

하늘 아래 보이는 것은 금강산 뿐이었다.

‘그리운 금강산’은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이다.


가보지 못한 금강산을 그리며 부르던 노래, 부르고 나면 가슴과 눈가가 촉촉해지던 한국인의 한이 담긴 노래다.

이제야 나는 그 꿈을 이룬 것이 아닐까.

가을 단풍으로 물든 금강산과 흰 눈 덮인 설산의 모습을 그려보며, 다시 이 자리에 서리라 다짐했다.



5. 그가 보고 싶다


대부분의 일행은 산에서 내려가고 있었다. 몇 명의 안내원만 내 주위에 서서 내가 빨리 내려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당황해진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내래 안내원의 호의를 받으며 내려가게 되어 영광입네다.”라고 능청스럽게 말하자, 그들은 “차만 타고 다니지 말고 좀 걸어 다녀야 되갔시오. 뒤에서 보니까 무릎에 힘이 없어 보입네다. 알겠시오?”라며 함께 웃었다.

산 위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등산화를 신지 않은 나는 엉덩이로 미끄럼을 타며 내려왔다. 그중에는 남한의 응급처치 요원과 안내원도 있었으나, 산을 지키는 북한 청년도 몇 명 있었다.

나는 그중 한 북한 청년과 함께 걸었다. 내가 미국 교포라서였는지, 그는 경계 대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남한과 미국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미국 정부는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그의 물음에 나는 미국을 대변하듯 내 의견을 들려주었다.


“국민은 굶어 죽어가는데 핵을 만들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태도를 대단히 위험하게 보고 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황해도에서 태어나 이산가족으로 살았기에 이북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너희는 남한 사람들보다 순수하고 서로 돕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 범죄가 적고 도덕성이 높다는 말을 북한을 방문했던 목사님에게 들었다.


인민들은 사랑의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수많은 국민이 굶어 죽고,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지 않는가.

탁아소에는 영양실조로 시체처럼 누워 있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았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울분을 느낀다.”

그리고 솔직히 말했다.


“너희는 김일성 수령님을 하느님처럼 존경하지만, 국민이 굶어 죽는 김일성 체제는 좋은 체제라 말할 수 없다.”


앳된 북한 청년은 “오늘은 대단히 기분 나쁜 날”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말한 북한의 실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이름을 물으며, 너의 위대한 어머니 김정숙 여사와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 이름을 바꾸셔야 되갔시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평양에 갈 텐데, 그때 너를 꼭 다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다.”

남한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드는 것은 금강산 관광 자체보다, 반세기 동안 밟아보지 못한 북한 땅을 밟아보고 싶었던 소망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산행이 통일로 닦아가는 급한 발걸음이 되길 믿고 싶었다.

내가 김일성 체제를 비판하는 말을 듣고 딸은 혹시 내가 반성문을 쓰게 될까 조마조마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진심을 그는 알았으리라. 오랜 시간 나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산을 다 내려와 헤어지면서 그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내면에 변화의 불씨가 되었기를 바랐다. 언젠가 탈북해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내가 들려준 진실을 깨닫게 되기를.



6. 여행을 마치며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흰색 고층 건물이 김정숙 휴게소라고 했다. 요즘은 이곳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서로 알아볼 수도 없이 늙어버린 얼굴을 부비며 통곡하는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산에서 내려와 선물센터로 안내받았다. 우리를 기다릴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사기 위해서다.

눈에 쏙 들어오는 물건이 없어 딸은 예쁘게 포장된 엿 두 상자를 샀다.

‘금강산 관광’이라고 수 놓인 타월도 사서 할머니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다.


이박삼일 동안 금강산에 허용된 극히 일부 코스만 보았다. 내금강에는 장연사를 비롯해 아직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사찰과 만폭동, 비로봉 등 수많은 절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모두 개발되어 자유롭게 여러 코스를 관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딸은 금강산에 온 것을 기뻐했다. 이곳을 통해 우리 민족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고, 우리나라 명산을 가슴에 품고 한국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딸은 대학 졸업 후 한 직장에서 7년을 일했고, 안식년을 맞아 서울의 외할머니와 1년을 살았다. 여행을 자주 하는 편인 나는 여러 나라 명산을 두루 다니며 감탄사를 연발했었다. 그러나 우리 금강산의 바위, 계곡, 수많은 산봉우리는 그 어떤 산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작은 한반도에 세계 어느 명산에도 뒤지지 않는 백두산과 금강산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통일이 하루빨리 이루어져, 신비로운 우리 성산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기를.

통일을 향해 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이 중단 없이 속도를 내야 한다. 가까운 장래에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필자 메모]


노무현 정부 때 육로로 금강산을 여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때, 그 많은 여행자 틈에 끼어 미국 시민자인 나도 참가할 수 있었다(2004년 5월 22~24일).

그 후 박근혜 정부 때 그 길은 다시 꽁꽁 얼어붙었고, 지금도 그대로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 남북한 선수들이 봉화대에 올라 함께 점화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걸어서 판문점을 넘어 남북 정상이 만난 때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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