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의 혼돈을 끝내고 진시왕은 천하통일(기원전 221년)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그의 손에 잡힌 광활한 땅을하나의 제국으로 만들었다. 그가 거처할 아방궁과 자신의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그 근처에는 병마용 군단을 만들어 지키도록 했다.
강력한 제왕은 책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생매장한 분서갱유의 폭군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이곳은 ‘동양의 로마’라 불리며 정치와 문화, 예술의 정점으로 꽃을 피웠다. 우리는 그 깊은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9. 진시황 관련 유적 및 비극
아방궁터.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아방궁 정전 위에서 만 명이 연회를 즐길 수 있었고,
다섯 장(丈)에 이르는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70만 명의백성들이아방궁을짓느라그들의 땀과 고통이 이 흙바닥 아래 묻혀 있을 것을 떠올리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왕의 그 화려한 꿈은 길지 않았다. 불로장생을 꿈꾸었지만 2년 후 병이 들어 생을 마감할줄이야. 아들진 2세가공사를진행했으나그의 죽음 불과 3년 뒤 정적이 불을 질러 석 달을 타오르다 재로 변했다는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는 자와 통쾌한자가 뒤섞여 세상은 울고 웃는 모습이 엉겨 붙었으리라. 결국 바람 한 줄기, 연기 한 가닥으로 사라질 우리네 인생임을 알았을까.
제국의 병사들, 2천 년 만에 깨어나다
50여 년 전, 만약 한 농부의 삽날이 흙 속에 잠든 거대한 군대를 깨우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둠 속에서 언제 깨어날 수 있었을까.
병마용은 진시황릉에서 불과 1km 떨어진 곳에있었다. 죽은 황제의 영원한 제국을 지키는 그림자 군대였다. 흙을 구워 만든 수천의 병사와 전차, 말의 모형이 끝없이 늘어선 모습은, 과거 진나라 군대의 장엄한 위용을 보여주었다.
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받은 네 개의 갱도는 그 자체로 완벽한 군사 체계를 보여주며, 이는 시황제의 철저한 지배욕과 치밀한 계획을 웅변하는 증거이다.
놀라운 것은 그 제작 과정이다. 머리, 몸통, 팔, 다리를 각기 다른 장인들이 분업하여 생산 라인처럼 만들어낸 그들의 지혜는,
대량의 병사를 신속하게 만들어야 했던 당시의 치밀함을 보여준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실물 크기의 병사들이 제각기 다른 표정과 갑옷,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당대 백성들의 다채로운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수천 구에 달하는 병사들과 말들이 땅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듯한 이 압도적인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진시황의 막강한 권력을 실감하게 한다.
동시에, 황제의 영원을 위해 삶을 바쳐야 했던 수많은 백성의 희생과비극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병마용갱은 오늘날 세계 8대 불가사의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다. 저 멀리 거대한 동산처럼 묵묵히 자리한 진시황릉.
그곳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을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다.
"왜 나를 지하에 가두고 있나. 2천 년은 너무 길다.
내 병사들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싶다. 천하를 갖고 보니 나는 죽고 싶지 않았건만, 불로초는 가짜였나. 50살에 죽다니! 무덤에서 노예처럼 일 시켰던 내 백성들에게 미안했어. 후세의 백성들이 몰려와 내 병사들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위로를 얻었어.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할까."
아직 열리지 않은 역사의 문
사마천의 《사기》기록된 대로, 수은으로 가득 찬 강과 정교한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전설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감히 온전히 마주하기 힘든 미지의 공간이라말한다.
중국 정부는 이 거대한 역사의 봉분을 서둘러 열지 않고, 후대에 온전히 남겨주려 한다. 진시황의 비밀은 여전히 땅속 깊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거대한 역사의 문은 과연 언제, 어떤 모습으로 열리게 될까?
10. 서안 성벽 위에서
서안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에 오르자, 600년 전 명나라 시대에 쌓아 올린 견고한 역사의 풍경이 발아래 펼쳐졌다.
동서남북으로 굳건히 서 있는 네 개의 성문은 과거 왕조의 번영과 몰락을 묵묵히 지켜봐 왔을 것이다.
한때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던 웅장한 요새였으나, 이제 그 성벽 위는 시민들의 편안한 산책로가 되어 평화로운 공원으로 변모했다.
성벽 위에서 바라본 서안은 과거의 장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예로부터 '천하의 중심'이라 불리던 고도(古都)는 이제
공장의 매연과 현대 도시의 소음으로 가득 찼다. 역사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새로운 시대를 향해 분주히 움직이는 서안의 모습은 마치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모습이었다.
11. 화청지와 비림
여정의 마지막은 찬란했으나 비극으로 끝난 당나라의 흔적을 따라가는 길이었다. 먼저 닿은 곳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 깃든 화청지이다. 이곳은 대대로 황제들이 즐기던 온천지였다.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전용 목욕탕까지 지었다고 한다.
입구에는 백옥 같은 자태로 천하를 매혹했던 양귀비의 석상이 우아하게 서 있었다. 미색과 재능을 겸비했던 그녀는 가무와 비파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 화려한 사랑은 결국 역사 속의 거센 비바람에 휩쓸렸다.
사랑에 눈이 멀어 정사를 소홀히 한 현종의 방심은 안녹산의 난을 불러왔고,
결국 왕위마저 내주어야 했다. 양귀비는 젊은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으며 사라져 갔다.
현종이 세상을 떠난 지 오십 년이 지나서 백거이는 이 비극적인 사랑을 서사시 『장한가』에 담아냈다. 시인의 상상력이 애절한 노래로 그들을 되살린 것이다.
내 마음에 오래 남아 있는 구절이 있다.
“하늘에서 새가 된다면 비익조가 되어 날고,
땅에서 나무가 된다면 연리지가 되어 뿌리내리리라.”
화청지를 뒤로하고 발길이 닿은 곳은 숲처럼 비석이 늘어선 비림이었다.
이곳 박물관에는 약 14,000여 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고, 그중 천여 점의 비석이 전시되어 있다.
비석 하나하나에는 서예와 문학, 역사와 미학이 새겨져 있었다. 현종이 직접 남긴 글씨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는 그의 필체를 엿볼 수 있었다. 왕희지와 안진경, 유공권 등 중국 서예사의 거장들이 남긴 흔적은 시대의 정신을 증언하고 있었다.
돌에 새겨진 글씨마다 붓의 결이 살아 숨 쉬었고, 세월의 마모 속에서도 사색의 빛을 잃지 않았다.
그 묵직한 필획은 단순한 글자를 넘어선 시대의 혼(魂)이었으며, 그 숲을 거니는 동안 나는 수많은 예술가들과 조우하는 듯한 감동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