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실크로드를 가다(2부)

by 국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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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7. 돈황, 옛 친구들과 걸은 길


기차는 밤의 장막을 뚫고 동쪽 돈황을 향해 내달렸다. 객실에는 오랜 시절을 함께한 친구 넷이 모여 작은 세상을 만들었다. 창밖은 거침없는 사막, 기적 소리와 덜컹거림만이 까만 밤의 자장가가 되어주었다. 비몽사몽 눈을 뜨니 이미 창밖은 훤히 밝아 있었고, 기차는 여전히 죽음 같은 모래의 바다를 뚫고 달렸다.


돈황은 겹겹의 역사가 묻힌 땅이다. 중국 간쑤 성 하서주랑에 자리한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천산북로와 천산남로가 만나는 곳, 교역의 요충지이자 군사적 요지였다. 기원전 한나라 무제 때, 이곳은 중국과 서역을 잇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비단과 차, 염료는 로마와 이집트로, 말과 금, 포도주는 서역에서 이 땅으로 들어왔다.


수입과 수출이 낙타의 걸음걸이에 달렸던 대상들의 팽팽한 생존이었다.


수백 마리 낙타가 한 줄로 모래바람에 실려 유유히 서역을 오가는 풍경은 우리에게 사치스러운 낭만일 뿐이었다.


이곳에 서니 생사를 걸었던 그들의 간절함이 사무치게 전해진다.


한무제의 특사 장건, 후한의 장군 반초, 당나라 현장법사, 신라의 혜초, 그리고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까지. 그들의 발자취가 장안으로, 또 서역으로 뻗어간 그 길 위, 우리는 문명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명사산이었다. 고비사막과 실크로드가 만나는 둔황의 중심에, 일명 ‘노래하는 모래산'이라 불리는 거대한 모래 언덕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바람은 모래를 부딪치며 장대한 교향곡을 작곡했고, 그 몸부림으로 산등성이의 곡선이 끊임없이 바꾸었다. 하늘 아래 만나는 선들은 삼각형, 마름모, 혹은 끝없는 파도처럼 기하학적 무늬를 그려냈다.


바람은 매일 밤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조형물을 빚어내는 예술가였다.


그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선의 미학에 매료되어 발길을 떼기 어려웠다.


낙타를 타는 대신 우리는 모래 썰매에 몸을 맡겼다. 100미터가 넘는 높이에서 썰매는 중력을 거스르듯 질주했고, 우리는 튕겨 나가고 뒤집히며 모래 위를 뒹굴었다. 온몸에 사막을 뒤집어쓴 채 서로를 보며 터뜨린 웃음은 모래 언덕 위로 퍼져나갔다.

모래 언덕 아래로 내려오자 신비로운 초승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년 모래바람에도 본래의 형상을 잃지 않은 월아천이었다.


나는 사막의 심장부에 깃든 한 줄기 생명력 앞에서 경외감을 느꼈다.


낙타와 대상들의 마지막 쉼터였던 이곳에서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두 손 모아 자연 앞에 경건해졌다. 밤하늘에서 내려온 별빛처럼, 월아천은 사막의 품 안에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이 기적 같은 풍경에 대한 감회는 예로부터 이어져 왔으리라.

이름 모를 시인이 읊은 <월아천가(月牙泉歌)>가 마음에 닿는다.


천지가 교묘히 숨겨둔 궁벽한 황무지에,

차가운 샘물이 하늘 밖으로 절반쯤 나왔네.

모래 산이 사방에서 옥 조각처럼 둘러싸고,

작은 티끌 하나 감히 샘물에 떨어지지 못하네.


오랜 세월 동안 월아천은 모래 폭풍을 이겨내며 제자리를 지켜왔다. 이 경이로운 광경은 여행자들에게 위안을 주었고,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구원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8. 구원의 빛, 막고굴


둔황 시가지를 벗어나 동남쪽 사막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성문이 나타났다. 막고굴로 향하기 전, 우리는 당나라 시절 '사주'라 불렸던 돈황성을 재현한 세트장에 들렀다. 영화 촬영을 위해 만든 공간이었지만, 철저한 고증 덕분에 천 년 전 실크로드 교역 도시의 활기 넘치는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술집, 쌀집, 여관, 관청은 물론 아편을 팔던 가게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명의 꽃은 언제나 상업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차로 삼십 분쯤 더 달려 드디어 막고굴에 섰다. 사막의 벼랑을 병풍 삼아 길게 이어진 바위산. 그 속에 남북으로 1,600미터에 걸쳐 600여 개의 굴이 파여 있고,


2,400여 점의 불상과 4만 5천 제곱미터에 이르는 벽화가 숨 쉬고 있었다.


그 방대한 숫자들이 내게 압도적인 무게로 다가왔다.


막고굴의 역사는 서기 3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

승려 낙준이 명사산과 삼위산에 신비로운 빛을 보고 석벽을 파 굴을 만들었다는 그 시작이었다.


이후 천 년 동안 수많은 승려와 예술가, 시주들이 드나들며 오늘의 장대한 불교 예술 세계를 이루었다.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우며 문화예술의 정점을 찍었던 때는 당나라 시대였다. 255개에 달하는 굴이 이때 조성되었고, 벽화들은 섬세하고 화려한 색채를 뽐내며 당대의 영화를 증언하고 있었다.


둔황의 도서관, 제17 굴 장경동.

백여 년 전, 석굴을 지키던 도사 왕원록이 우연히 발견한 작은 밀실이다. 그곳에는 5만 점에 달하는 경전과 고문서, 악기, 회화 등이 천 년의 시간을 견디며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경악스럽게도, 그는 그중 4만여 점을 외국 탐험대에게 헐값에 팔아넘겼다. 혼란의 시대, 그에게는 그저 손에 쥔 물질에 불과했으리라. 스타인과 페리오가 가져간 보물은 지금 런던과 파리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


신라 승려 혜초가 인도와 서역을 여행하며 기록한 『왕오천축국전』도 그때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문화재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아쉬움은 크지만, 동시에 인류의 보물로서 세계 곳곳에서 소중히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 위안으로 남았다.


현재 개방된 492개 굴 가운데 일부만 관람할 수 있었다.

밖에서 보면 그저 작은 구멍에 불과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굴마다 다른 표정의 불상들, 빛바랜 색채 속에서도 생생히 살아있는 보살의 행렬, 부처 곁을 수놓은 연꽃송이들.


벽화 속 수심 어린 눈빛과 유려한 선율 같은 곡선은 천 년을 뛰어넘어 나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특히 측천무후의 발원으로 조성된 34.5미터의 거대한 미륵불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발가락 하나가 내 몸만큼이나 큰 불상 앞에서 나는 작은 벌레처럼 느껴졌다. 천장에서 스며드는 한 줄기 빛이 부처의 얼굴에 닿을 때,


신비로운 힘이 방사되듯 퍼져 나왔다.


천 년 전 이 사막 한가운데서 어떻게 이런 장엄한 불상이 세워질 수 있었을까.


오직 신심이었을까, 아니면 권력의 힘이었을까. 그 질문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서역으로 향하던 구법승과 대상, 군사들이 이곳에 들러 기도를 올렸고, 그 간절한 발걸음과 기도가 쌓여 오늘날의 막고굴이 되었다. 여행의 절정에서 나는 가슴이 요동치는 감동을 느꼈다.


종교적 구도의 힘으로 빚어진 돈황의 예술, 그 감동은 사라지지 않고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영원히 다가올 것이다.


사막의 모래바람은 스쳐 지나가도, 벽화 속 눈빛은 천 년을 건너와 지금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돈황의 바람은 고요히 속삭였다.


옛사람들의 간절한 기도가 남긴 숨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구원의 빛이라고.


그리고 나는 보았다. 함께했던 옛 친구들의 눈망울 속에서도 그 빛이 반짝이는 것을.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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