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13. 성찰의 지성, 그 깊은 뿌리를 찾아서

by 국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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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편


13. 성찰의 지성, 그 깊은 뿌리를 찾아서

-‘독일은 누구인가’-


베를린에서 시작된 여정은 남쪽의 뮌헨을 거쳐 서북쪽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베를린 장벽 앞에서 분단의 상처를, 포츠담의 궁전에서 전후 세계 질서가 재편되던 역사의 냉기를 느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통일의 불씨가 된 시민들의 촛불을, 바이마르에서는 괴테와 실러가 일군 인문학의 정원을 거닐었다.

다하우(Dachau) 수용소의 비극적인 참상까지, 튜방겐의 헤세와 횔덜린, 칼 마르크스, 그리고 뮌헨의 한국인 이미륵, 전혜린의 흔적까지 19개 도시를 훑은 이 대장정은 독일이라는 거대한 지성을 키워낸 원동력을 찾는 탐구였다.

끔찍한 전쟁의 가해자였던 독일은 이제 지구상의 '이상 국가'를 꿈꾸며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있다. 전쟁 없이 민족 통일을 일궈낸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독일은 누구인가'를 묻는 일은, 우리에게 질문이자 과제였다. 문명은 때로 전쟁을 일으키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 또한 결국 인간의 성찰임을 나는 이 길 위에서 사색한다.

자유의 도시, 베를린에서

독일 하면 우리는 베를린을 떠올린다. 1936년, 손기정 선수가 가슴의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그 슬픈 영광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의 아픈 단면인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으로 흐른다.

1967년,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등 예술가들이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어야 했던 그 차가운 시대의 그림자이다.

그러나 베를린을 무엇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1990년, 그 견고했던 장벽을 무너뜨리고 일궈낸 ‘통일 독일’의 감격이다.


담장이 예술이 된 현장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동독 정권은 서 베를린을 고립시키기 위해 155km에 달하는 거대한 장벽을 쌓았다. 동독 땅 한가운데 섬처럼 갇혀버린 서 베를린. 그 장벽이 무너진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것이 그 살벌했던 베를린 장벽이라니!”

길 건너 화려한 색채로 채워진 담장은 마치 서울의 덕수궁 돌담길처럼 정겹기까지 했다. 우리가 상상하던 38선 철조망과 지뢰밭, 우거진 잡초로 가득한 살벌한 경계와는 너무도 달랐다. 수천 년을 함께 살아온 민족이 이념의 실험을 위해 칼끝을 겨누어야 했던 시간. 냉전이 끝난 오늘날에도 북녘의 동포들은 굶주림 속에서 체제라는 허깨비를 붙들고 있다.

베를린 장벽은 이제 화가들의 캔버스가 되어 현대 회화 전시장으로 거듭났다. 우리의 휴전선도 언젠가 이처럼 시민들의 쉼터이자 예술가들의 공연장이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통일의 문을 지나 지성의 요람으로

독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섰다. 과거 판문점처럼 접근조차 힘들었던 이 문을 이제는 국경 없는 바람처럼 누구나 자유롭게 오간다. 보리수 가로수를 따라 걷다 보니 위풍당당한 유리 돔을 올린 연방의사당이 보이고, 곧이어 근대 대학의 효시인 훔볼트 대학에 다다랐다.

아인슈타인부터 헤겔, 마르크스, 엥겔스에 이르기까지 인류사의 거인들이 거쳐 간 이곳. 프러시아가 나폴레옹에게 짓밟혔던 시절, 피히테 교수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며 민족의 결속을 호소했던 강당의 열기가 여전히 느껴지는 듯했다. 독일 통일의 저력은 어쩌면 이처럼 깊은 철학적 전통과 학문적 자존심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손기정의 발자취와 우리의 과제

여정은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으로 이어졌다. 손기정, 남승룡 두 선수의 이름이 선명히 새겨진 그곳 전망대에서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전쟁으로 도시의 80%가 파괴되었지만, 독일인들은 역사적 건물들을 하나하나 기적처럼 복원해 냈다.

물론 통일 후 3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동서 간의 경제적 격차와 심리적 후유증은 남아 있다. 갑작스러운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한 동독 주민들과 막대한 통일 비용을 감내하는 서독 주민들의 한숨도 무겁다.

민족의 결합은 이루었으나, 진정한 통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분단 70여 년을 넘긴 한반도. 우리는 지금 통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베를린의 맑은 하늘 아래서, 나는 아직 오지 않은 우리의 내일을 오래도록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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