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서양의 뿌리를 찾아서]
5. 포토타임이 다가오다
고대 도시 고린도에 도착했다. 기둥 몇 개만 남은 아폴로 신전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태양의 신 아폴로는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 도시는 한때 상업과 향락으로 번성했던 퇴폐의 땅이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장’을 남겼다. 그 구절의 아름다움은 한때 나를 기독교에 오래 머문 힘이었다.
사랑을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는 늘 깊은 강이 흐른다. 그 깨달음이 나는 왜 늦었을까.
언덕 아래에는 식수를 저장하던 거대한 물탱크가 있다. 지금은 말라비틀어진 채 흔적만 남아 있다. 고대의 영광은 사라지고, 부서진 건축 잔해만이 흩어져있을 뿐이다.
그 폐허를 남겨두고 곧 고린도 운하로 이동했다. 에게해와 이오니아 해를 잇는 이 운하는 로마황제 네로 시절에 시작되었지만, 완공은 19세기에 이르렀다.
다리가 바닷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배가 지나가면 다시 떠오르는 광경! 석양과 함께한 그 순간은 기억 속에 남았다.
[나바지오 해변]
킬리니 항으로 이동해 페리를 탔다. 버스를 갈아타고 좁은 산길을따라 섬을 돌았다.
나바지오 해변 전망대에 올랐다. 깎아지른 듯한 두 절벽 사이,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아낌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파랑, 초록, 흰 거품이 뒤섞인 그 색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유명해진 이곳에서 관광객들은 열광했고, 나도 그 물빛 앞에서 숨이 멎을 듯한 순간을 맞았다.
“저기 아래서 연인들이 속삭이는 사랑이야기가 들리지 않아.” 하이디가 환한 미소로 말했다. 해변은 배로만 접근할 수 있어 직접 밟아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바위 위에서 본 그 장면은 충분히 황홀했다.
가파른 언덕 위의 전통 마을은 꼬불꼬불한 길과 파란 지붕, 하얀 벽이 인상적이었다. 동네의 상징인 시계탑, 천 년 된 올리브나무가 있는 수도원, 그림 같은 장소에서 우리의 기념사진은 늘어만 갔다.「태양의 후예」의 촬영지를 따라서 둘은 한 쌍의 연인처럼 사진 속에 우정과 사랑을 담아놓았다.
6. 팔짱 끼고 섬을 돌던 곳
산토리니섬
이른 아침, 아테네 공항에서 국내선 소형 비행기를 탔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산토리니 섬에 도착했다. 작은 시골 역 같은 공항 앞에는 관광객을 기다리는 버스와 택시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바다를 끼고 버스는 달렸다.
‘꽃보다 할배’를 촬영했다는 한 해수욕장에 들렀다. 바닷가에 검은 바위가 많아 제주도의 검은 돌을 떠오르게 했지만, 경관은 제주도만 못했다. 한여름에는 수백 개의 텐트와 파라솔이 바닷가를 수놓는다고 한다. 해수욕장에서 사진을 찍고, 긴 해변을 걸어보았다. 우리가 기다리던 산토리니 마을을 찾아 버스는 더 높이 오르며 섬을 돌고 있었다.
바다 위에는 여러 섬이 어우러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원래는 한 덩어리였지만, 화산 폭발로 몇 개의 섬으로 나뉘었다.
그 섬들의 크기와 모양이 조화를 이루며 드넓은 바다에 우리의 눈과 마음이 끝없이 잠겨 들었다.
[파라 마을]
산토리니의섬은 제주도처럼 신혼여행지이며 유럽사람들이 찾는 여름철 휴양지이다.
하얀빛의 작은 집들이 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군데군데 파란 둥근 모자를 쓴 건물들은 교회란다. 바다를 향해 매달린 듯한 종들이 귀엽게 흔들리고 있었다.
동화 속 요정의 마을 같은 풍경의 폭 빠져있는 하이디와 모니카.
우리는 초대된 귀빈이라도 된 듯 우쭐해졌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저녁노을빛 와인은 단맛을 내며 얼굴을 붉히게 했다. 큰 새우가 들어간 스파게티를 먹으며,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고 또 마셨다. 노을빛과 와인으로 물든 얼굴로 마주 앉은 우리들. 한 폭의 그림이 되어 긴 시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이아 마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일몰을 보기 위해 걸었다. 좁은 골목을 메운 인파를 따라 계단을 오르내렸다. 어느덧 언덕 귀퉁이 정상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태양을 맞을 준비를 했다. 저녁의 찬바람을 맞으며, 마치 의식을 치르듯 흥분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저녁 6시쯤, 지평선 가까이 내려오는 붉은 태양. 마지막 힘을 다해 스스로를 불태우듯 산토리니의 하얀 집들은 황혼 빛에 취해 얼굴을 붉혔다.
태양은 붉은 몸을 바다에 던졌다.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내리자 도시는 불빛에 도취한 듯 밤의 열정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행 몇 명은 작은 돌로 포장된 요정들의 좁은 길을 따라 섬을 걸었다. 여행을 떠나는 날 다친 오른쪽 발목이 아직 성치 않았지만, 남정네들이 팔짱을 끼고 도와준 덕에 신이 났다. 그 힘으로 밤새 걸었다. 꿈속에서 백마 탄 기사가 내 손을 잡고, 하얀 마을을 누비며 요정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에필로그]
그동안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서양 문명의 가지와 잎, 열매를 만났다.
이번 그리스 여행은 그 뿌리를 마주한 시간이었다.
수백 개 폴리스 중에서도 문화와 예술의 꽃이 피었던 아테네, 그 심장은 바로 아크로폴리스였다. 파르테논 신전과 아고라 광장의 유산은 지금도 내 가슴을 뛰게 한다.
그리스 지혜의 시작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서사시를 성경처럼 외우며 살아갔다. 신들이 넘쳐나던 이 땅에서 그들은 인간처럼 불완전한 신들을 숭배했고, 신화를 중심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지어냈다.
올림포스의 제우스는 열두 신을 만들었고, 그중의 반은 여신이었다. 하지만 제우스의 딸 아테나를 숭배하던 도시에서조차 여성은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고 올림픽에도 출전할 수 없었다. 여성은 오롯이 가사와 출산에 묶여 가정에 있었다.
그 시대, 단 한 명의 여성이 남성들의 철학 모임에 참여했으니, 바로 소크라테스와 토론을 나누던 이방인 아스파시아였다. 미모와 지성으로 페리클레스의 연인이 되었고, 그의 연설문을 써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시대의 예외였던 그녀는 어쩌면 조선의 황진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공기는 맑고 태양은 강렬하다. 과일과 채소는 본연의 맛을 지키고, 올리브오일과 요구르트를 주식으로 삼는 사람들은 건강하고 소박하게 살아간다. 비만은 드물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리듬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전쟁 난민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시리아 난민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 유럽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빛엔 깊은 슬픔과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다. 경제 위기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리스는 여전히 생존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리스를 떠나며 철학과 신화가 어우러진 이 땅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었다. 무너진 신전 기둥 사이로 시간의 바람이 불어왔다.
서양 문화의 뿌리는 신이 아닌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아테네가 이룬 문명의 뿌리가 자라 잎과 열매가 실해져서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틈틈이 읽은 그리스 역사는 친구와의 대화를 풍성하게 했다. 역사의 현장을
걸으며 나눈 대화들은, 제철 맞은 유월의 앵두처럼 내 기억에 달콤하게 피어난다.
코비드 후유증에 삶이 잿빛으로 흐려질 때면, 나는 그날의 사진첩을 펼친다.
글쓴이 소개
필명: 국화 리
숙명여고와 서울교육대학 졸업.
1982년 미주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한의사로 활동(산타모니카) 한의학 박사
2006년 미주『문학세계』로 등단
2010년 서울 『한국산문』으로 재등단
2025년 수필집 『사랑을 말하고 싶은 날』출간
미주문인협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이사
현재 로스앤젤레스 피오피코 도서관 후원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