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와의 대화.

by gulogulo

놀랍게도, 저는 디자인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묘하고 아름다운 광증은 작은 조카에게 이어진 듯합니다.


작은조카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더군요.


흔해빠진 클리셰지만, 여동생이 산후조리원에서 안고 있는 걸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고 녀석이 고3이랍니다.


오늘 조카가 갑자기 톡을 보내왔습니다.


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서양화과는 어때요?


나: 응? 어떤 면에서 어떠냐는 거야?


조: 그냥, 전체적으로요.. 어때요?


나: 음.. 일단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면, 재미있을 순 있어. 그런데, 모든 재능 관련 과가 그렇듯 거기는 전국에서 모인 재능 있는 아이들이 있으니 초반에 잘못하면 천재를 만나서 좌절할 수 있어.


나: 스스로의 재능을 소중히 오래 간직하는 게 목표라면, 관련 과를 가는 건 권장하지 않을 수 있어.


나: 그런데, 그런 거 상관없이 ‘그냥 그림을 더 배우고 싶어!’ 라면 가 보는 게 도움이 될 거야.

아마 지금까지 그린 것의 몇 배는 더 오래 그림을 그리게 될 테지.


조: 쌤이 “너는 서양화과 가는 게 좋겠다.” 하셔서 물어봤어요.


나: 삼촌은 미래엔 다른 것보다 창의력이 중요할 거라고 생각하거든? 어쩌면 그런 예술과를 가서 마음속에 있는 걸 꺼내는 방법을 배우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선생님 의견보단,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렴


조: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요.


나: 뭐 할 때 재밌어?


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림 그릴 때?


나: 그럼 딱이네. 그게 아무 생각 없는 게 아니라, 네 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거거든. 속에 있는 걸 꺼내는 방법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찾아 헤매는데, 너는 이미 가지고 있네.


조: 지금은 디자인 입시 준비하는데, 너무 힘들어요.


나: ㅋㅋㅋ 그건 그림이 아니고 입시니까.


조: 서양화 입시도 똑같겠죠?


나: 삼촌은 입시하고 멀어진 지 오래라 사실 잘 몰라^^;


조: ㅠㅠ


나: 서양화과를 갈까 디자인과를 갈까 고민하는 거야? 삼촌 생각에, 둘 다 뭔가를 꺼내는 걸 가르쳐주긴 하는데.. 디자인과는 남들을 대신해서 꺼내는 방법도 가르쳐.


조: 사실 디자인과를 가려고 한 이유가 미술 쪽에서 그나마 돈 많이 번다길래 그런 것도 있어요. 디자인에 별 관심 없어도 할 만하겠죠?


나: 디자인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뭔지 알아야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있겠지?


조: 포스터나 명함 만들기? 유아이 디자인?


나: ㅋㅋㅋ 아니, 그래서 디자인이 뭔데? 그냥 그림이랑 뭐가 다르다고 생각해? 디자인에 대한 정의에 디자인이란 말을 다시 쓰면 어떡하니 ㅋㅋ


조: 뭐라 해야 하지..;;


나: 삼촌이 생각하는 건, 회화는 자기 마음이라는 야생에서 열매를 따서 먹는 거고, 디자인은 요리야.


나: 열매는 내가 따먹으며 기쁘면 그만이고,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고 남들도 그 열매의 맛을 상상하고 그 열매를 먹고 싶게 만들지만.


나: 요리는 내가 먹기 위함도 있지만, 대체로 남들을 생각하며 내 철학을 남에게 대접하려고 만드는 거지. 그게 삼촌이 생각하는 순수미술과 디자인의 차이야.


조: 그냥 백수 하고 싶어요.


나: 삼촌도 ㅋㅋㅋㅋ 그리고 사실 대학생은 백수란다.ㅋㅋ


조: 기간제 백수는 싫어요.


나: 그것도 좋지 ㅋㅋ 근데 사람이 살아가는 건, 전부 돈이나 노동이랑 바꾸는 거야. 백수는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ㅋㅋㅋ


조: 그럼 그냥 거지 할래요.


나: 거지도 돈을 쓰는데? 근데,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조: 노는 게 제일 좋아서.


나: 삼촌도 노는 게 제일 좋아 ㅋㅋ 근데 잘 놀려면 돈이 필요해. 가장 현명한 방법은 놀이로 돈을 버는 거지 ㅋㅋ, 그래서 재밌어하는 걸 일로 삼으라는 거야.


조: 두바이 가서 동냥하면 돈 잘 번다던데..


나: 그 동네 요즘 위험하다 ㅋㅋㅋ


조: ㅠㅠ


나: 두바이 가서 같이 동냥할까? ㅋㅋ


조: 비행기표 내주시면요 ㅠㅠ


나: ㅋㅋㅋ 비행기표야, 가서 동냥해서 네가 갚으면 되지 ㅋㅋ


나: 근데 조금만 기다려, 삼촌은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아서 ㅋㅋㅋ 책도 쓰고 싶고, 한 십 년만 더 기다려주렴 ㅋㅋㅋ


조: ㅠㅠ


미안하다 조카. 너와의 대화를 삼촌이 몰래 글로 바꿔버렸다 ㅋㅋ

작가의 이전글출입금지 철망 뒷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