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 근래의 이런저런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저쪽은, 부끄러움이라는 게 없는 사람들인가 봐.”
그 말에 나는 무심코 이렇게 답했다.
“누군가 천억을 준다고 하면, 너도 벌거벗고 광화문 광장을 뛸 수 있지 않겠어?”
결국 인간에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큰 이익 앞에서는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얘기다.
예시로 천억을 말했지만,
사실 실제로 돈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하면
내 부끄러움의 가격은,
내 생각보다 훨씬 저렴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렇게 흔들릴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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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에게 약간의 오점이나 사심이 드러나면
‘정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듯
‘평등’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듯
이상할 만큼 빠르고 무자비한 반응이 쏟아진다.
위선.
이건 선의를 가진 자들의 오래된 원죄이자
굳이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공연한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선을 행하는 데에는, 거창한 이상이나
가치에 대한 투쟁이 필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자격기준을 매우 높게 설정해 두었고, 그것은 사회적 강자에겐 한없이 더 높아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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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좋은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고결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익을 원하고
그것에 흔들리는 보통의 사람들일 뿐이다.
비기득권층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그들을 타깃으로 삼는 좋은 정책들이 쉽게 나오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회적 약자에게 재화나 복지를 분배하는 일이
당연한 일인 동시에, 고결하고 아름다워야 하며
한편으로는 가식적이며 부담스러운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의 흠결이나 이익 추구가 드러나는 순간,
사회적 약자를 중시하며, 재화의 분배를 이야기하는
지도자는 그 자격을 잃은 듯 취급받고, 지지층은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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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일부의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 복잡하고 어렵고 고결해야만 가능한 평등과 정의의 길 대신, 차라리 지금 기득권에 편승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들의 눈에 보이는 기득권층은
마치 성루같이, 탄탄하고 멋있어 보인다.
한 번 올라타면 더 이상 흔들릴 일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전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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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체제에서
절대다수라는 ‘머리수’를 가진 비기득권층은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사람을 뽑고,
기득권이 가진 부와 권력을 ‘찬탈’할 수 있다.
그건 아주 쉽지만, ‘정당한 사익추구’이다.
그리고 기득권의 테두리 바깥에서 콩고물을 기다리는 것보다 자존감에 있어서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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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썼던 글에서
이런 비유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매달려 있는데
누군가 그 가지를 톱질하고 있다면
내가 떨어질 자리에 있는지
아니면 아직 매달려 있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지 정도는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톱질에서 내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다음번 톱질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건
누구도 떨어져 죽지 않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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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 중에도
평등과 공정을 이야기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우리에겐 지금
투표도, 권리도, 말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