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도 나아갈 수 있는 힘
이전 '방전'이라는 글에서 내게 다가오는 크고 작은 번아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나를 방치하고 내버려 둠으로써 나의 에너지를 다시 충전시킨다고 글을 맺었었지만, 주제에 관해선 아직 더 할 말이 남아있었다. 바로 루틴이다.
날씨가 서늘하면서도 따뜻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거나, 내 몸과 마음이 방전이 되어 아무 힘도 내지 못할 때가 있다. 충분히 적당한 생각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나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이 근 몇 년간 써먹은 방법인데,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에 숨쉬기나 손가락 까딱하기까지 끼워 넣지는 않는다. 하물며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도 숨은 쉬니까 말이다.
하루라도 빠르게 시작했을 때 내 남은 수명까지 복리의 힘으로 불어나 나의 자산이 될 것들이 있다. 처음부터 큰 눈덩이를 속도감 있게 굴리면 3년 안에 큰 눈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 눈사람이 당장 내가 급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큰 눈덩이를 만들 여력이 안되거나 그러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작은 눈덩이를 천천히, 느긋하게 10년 굴리면 된다. -심심할 때 눈덩이가 몇 센티이고 n 년을 굴려야 몇 센티의 눈사람이 나올지 계산해 봐야겠다.- 느긋하게 눈덩이 굴리기를 나는 루틴이라고 부른다.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내 몸에 체화되어, 느릿하지만 천천히 내 힘이 되어줄 것들을 계속한다. 미리 습관화하면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에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더라. 내가 방전상태에서도 하는 최소한의 루틴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일어나자마자 5분 이상 스트레칭하기. 21년도 봄부터 계속해서 벌써 3년째 진행하고 있다. 직업 특성상 목과 어깨가 자주 아프고 병원을 들락날락했었다. 병원을 생각하면 비용보다는 치료에 대한 무서움-사실 병원 진료가 그렇게 아프진 않다.-과 시간이 아깝다 싶었다. 내가 좀 더 건강했다면 치르지 않아도 될 일 아닌가. 일어나면 꼭 스트레칭용 요가매트를 깔고 목을 풀고 굳어있던 근육을 유연하게 만든다. 물론 지금은 깁스 때문에 2개월 가까이 쉬고 있어 기분이 이상한 상태다.
두 번째는 공부하기다. 주로 논문이나 전공책을 전자책으로 읽는 편인데, 하루에 독파해야 할 최소한의 임계치는 정해놓고 읽는 편이다. 이러면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며 쉬는 하루에도 30분은 공부하게 된다. AI 개발자는 꾸준히 공부하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을 때 이를 거르면 방전상태에서 벗어난 나에게 미안해질게 분명하다.
세 번째는 책 읽기. 최근엔 경제책을 위주로 많이 읽었는데, 많은 책에서 말하듯이 10p라도 읽겠다고 펼치면 30분은 금방 채운다. 책 하나 읽었다고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번아웃이 왔을 때 다른 결의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말해도 천재지변이나 내 마음이 너무 나약해질 때 이 최소한의 루틴들을 빼먹을 때도 분명 있다. 어쩌면 이런 루틴은 편하게 쉬고 싶을 때 나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그래도 무언가를 조금씩 오랫동안 이어놓으면, 내가 인지하지 못할 때 선물처럼 큰 눈사람으로 자라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