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보다 빼곡히 채운 '팔레트'
나는 정신과를 거진 10년 다니고서야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진단받은 '성인 ADHD' 환자다. 성인 ADHD가 마치 유행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할 무렵, '혹시 내가 그 성인 ADHD 아닌가?!'하고 먼저 의심을 품은 것도 아니다. 당시 나는 조울증 2형으로 오진되어 4년이나 먹으면 안 될 약을 잘못 먹고 있었다. 사는 게 아니라 아직 용기가 없어 못 죽었는데 시간이 저 혼자 흘러버리는 기분으로 4년을 살았다. 세심하고 용감했던 의사 선생님이 나를 몇 달을 지켜보시다가, 도저히 조울증은 아닌 것 같다며 '모험'일 수 있지만 가치가 있는 시도를 한번 해보자고 하셨다. 조울증 약을 조금씩 줄이고 ADHD약을 점차 추가하면서 그렇게 ADHD치료가 시작됐다.
많은 성인 ADHD 환자들이 우울, 불안, 강박을 함께 겪는다고 한다. 동반질환을 갖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알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ADHD는, 특히나 아주 나중에서야 진단받은 성인 ADHD는, 모두가 저마다의 처절한 드라마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 사람의 당사자로서 내 살아온 삶과 환우들의 이야기를 경험적으로 종합해 보건대, 성인 ADHD는 어쩔 수 없는 두 가지 공통된 특성을 갖는다. 첫째, 자아상에 상처를 입는다. 일찍 치료받았더라면 어쩌면 허락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을 부정당한 채, 존재도 모른 채로, '세상의 문법에 맞지 않는 이상하고 모자란 나'로 살게 된다. 살기 위해 받아들인다. 둘째, 저마다의 적응기술을 연마한다. 틀에 맞추기 위해 자기 모서리를 마모시키는 퍼즐 조각의 애잔한 굳은살 같은 거다.
성인 ADHD의 비극은 어쩌면 낭비하지 않았어도 됐을 에너지를 증상에 기인한 그 '남다른 모자람'에 한없이 쏟아부어야 하는 데 있다. 심지어 그게 밑 빠진 독이라 부어도 부어도 차오르질 않는다. 그래서 정말 쏟아야 할 곳에는 쏟을 에너지가 더 이상 없다. 그리고 이걸 알아채고 안타까워할 여유조차 없다. 내가 또 오해했을지 모르는 방금 들은 그 말의 속뜻, 당장 코앞으로 닥쳤는데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 과제들, 기어이 또 놓고 온 우산 같은 것들에 한참을 밀리기 때문에.
ADHD 치료를 처음 시작할 때에, 나는 세상 사는 법을 비로소 배워나가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걸 새로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인 ADHD의 증상, 즉 불가역적인 뇌 구조의 결함이 도무지 '다양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될 만큼 삶에 미치는 영향이 방대하기 때문이다. 매일 새로운 나를 봤다. 그제야 비로소 허락되는 필연적인 과제들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밀린 숙제를 해치우듯 조금은 겁에 질린 채로 해치워나갔다.
몇 년 지난 지금은 내 멋대로 치료의 '안정기'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약 4개월 전 새로 옮긴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최근 이렇게 말씀하셨다. ADHD 치료의 핵심은 선택지를 늘리는 데에 있다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딸랑 두 가지가 아니라, 하고 싶어도 상황에 따라 하지 않고, 하기 싫어도 상황에 따라 할 수 있는 그러한 형태의 확장. 그래서 단순히 하기 싫은 것 하는 '실행'에만 중점을 둘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도 안 하는 '절제'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셨다. 예를 들어 아무리 가기 싫어도 아침 되면 다시 헬스장에 가는 것은 실행이고, 아무리 비가 온들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먹지 않고 참는 것은 절제다(ADHD는 당연히 온갖 중독에 매우 취약하다). 이 양 방향을 다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왜 내 뇌는 '해야 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의 분류밖에는 없는지 의아해하고 원망했다. 온 세상이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데 하면 안 되는 것들로만 가득 찬 것처럼 숨이 막혔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하고 싶으면 해버리고 하기 싫으면 곧 죽어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늘 내가 그 이상 노력할 수 있었는지를 의심하고 자책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내가 나인 게 싫었다. 나라도 나를 흠씬 쥐어패 버리고 싶다고 치를 떨면서도, 또 어쩔 수 없이 그게 나니까 꾸역꾸역 데리고 살아왔다.
의사 선생님의 말은 언뜻 특별할 것 없는 당연한 말 같았지만, 어쩐지 집에 오는 내내 곱씹고 생각해 보게 됐다. 곧이은 '아, 나는 선택지가 없이 살아왔구나.'라는 자각. 증상으로 인해 실행과 절제가 어려웠고, 그게 일찌감치 굳어져 애초 선택지로 존재조차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와서는 다이어리에 좌표평면을 그렸다. X축은 '하고 싶은가(동기)', Y축은 '해야 하는가(의무)'. 이에 따라 내가 각별히 신경 써야 할 영역이 2사분면(하기 싫어도 해야 함, ex 운동)과 4사분면(하고 싶은데 하면 안 됨, ex 음주)이란 걸 시각화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건, 눈에 보이게 그리고 나니 선택지의 존재가 전제처럼 당연하고, 내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전에는 습관이나 이미 수없이 실패한 경험에 비추어 의식에 떠오르지 않았을 선택지들이 온전히 동등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게다가 좌표평면을 그리고 영역을 나누니 이게 마치 내 행동목록을 각 영역에 분류해 넣는 게임처럼 느껴져 재미있었다.
사실 그러고 나서 달리 뭘 더 하진 않았다. 순식간에 기가 빨려 침대로 누워 유튜브를 봤다. 그런데 집 와서 보일러 트는 걸 까먹어 이불 덮고도 너무 추웠고, 그러다 보니 더 일어나기 싫었고, 일어나지 않으니 바닥에 널린 짐들을 치우고 청소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내가 지금 일어나서 보일러 켜고 청소를 하면, 4사분면(눕고 싶지만 일어남)과 2사분면(하기 싫어도 청소함)을 동시에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드니 당연한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계획한 것보다 더 많은 영역을 청소할 수 있었다.
하고 싶지만 하면 안 되는 것과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 '하고 싶어도 안 할 수 있음'과 '하기 싫어도 할 수 있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침에 분식집에 갔다. 무지하게 배고파서 만두라면에 김밥도 시켰다. 그런데 먹다 보니 생각보다 배가 빨리 불렀다. 이 이상 더 먹으면 '불쾌할 정도로 배부를 것 같은'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 그와 동시에, 기왕 돈 내고 시켰는데 오후까지 버티려면 다 먹는 게 낫지 않겠냐는 다분히 계산적인 논리가 함께 돌아갔다. 왠지 더 먹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게 나한테 더 익숙한 패턴 같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순간에는, '내 몸의 편안함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더 먹지 않고 남겼다.
그러자 또 순식간에, '내가 그만큼 소중한 존재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여전히 거기에 논리적으로 답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근데 그게 뭐, 알 바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내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는데, 그걸 전면으로 부정하는 생각이 떠오른 게 난생처음이었다. 그런데 생각이 들고 나니 그 길로도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증명하지 못하면, 증명을 거부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궁금해졌다. 내 몸의 불편함 대신 돈 몇 푼의 아까움을 감수하면서 적당히 배 부른 상태로 식당을 나서니, 그저 편안하고 좋았다.
길을 걸으면서, 이제 내게는 다른 선택지들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약을 먹고 치료 중이고, 나를 돌아보고 노력하고 있으니, 이제는 다른 길로도 갈 수 있는 거였다.
한평생 나를 지배해 온 것은 '가치 증명의 의무'였다. 감히 그걸 멋대로 내팽개치고 그런 거 없이도 나는 '그냥' 소중하다고 속으로 소리치고, 이미 그런 것처럼 행동하고 나니, 충격적이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득만 있었다. 헬스장에 가서 러닝머신을 뛰면서, '그만큼 먹고도 소화하는 데에 한참이구나' 라는 생각과 '거기서 멈춰서 참 다행이고 편하다' 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그러고 나니 정말로 내가 챙기고 보살펴도 될 '소중한 존재' 같았다. 거기에 달리 이유나 근거나 논리 같은 걸 같다 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소중하다는 감각이 이미 내 몸에 느껴지는데 다른 건 아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들은 이제 아무 힘도 없어졌다.
내가 소중하다는, 나도 남들만큼은 소중하다는 '절대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을 완전무결하고 견고한 논리'가 있어야 나를 소중히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소중히 대하고 나니 이미 그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애초 증명이 필요한 성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사용하면서, 사용할수록, 확인되는 성질일 뿐이었다.
'자존감은 개인의 선택지를 확장시키는 인지적 태도로서, 적응적 행동의 실행 가능성을 높이고 부적응적 행동에 대한 통제가 강박으로 전이되는 것을 완충한다.'
오늘 러닝머신 하면서 자존감의 정의를 스스로 다시 세웠다. 불현듯 떠올랐다. 원래 나는 30분 타는 걸 목표로 하는데 어제는 35분을 탔다. 그리고 오늘은 42분을 탔다. 중요한 건 이거다. 내가 오늘 42분 탔다고 내일도 꼭 40분 넘게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냥 이건 오늘의 경험이고 데이터다. 이걸로 알 수 있는 건 내가 컨디션이 좋으면 평소보다 운동을 오래 할 수도 있다는 거고, 그러면 더 뿌듯한 기분이 든다는 거. 물론 내일도 운동을 많이 하면 좋은 거지만 덜 한다고 그게 자책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나한테 모질게 채찍을 휘둘러야 내가 바른 길로 갈 것 같지만, 그 자비 없고 혹독한 태도가 오히려 선로를 이탈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비로소 진심으로 하게 된 거다. 웬일로 헬스장을 5일 연속 갔지만 당장 내일 다시 안 간다고 해서 나를 나무라진 않을 거다. 습관처럼 그런 생각이 들면 최대한 빨리 브레이크를 걸 거다. 나는 언제든 다시 선택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되고, 그럴 수 있으니까. 5일 연속 갔으니까 내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래본 적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단 걸 알게 된 것뿐. 단지 하나의 데이터일 뿐. 그런데 바람직한 방향으로 많이 쌓이면 나중 봤을 때 그래프가 단정하고 예쁘긴 하겠지. 그래도 그뿐이다. 나는 언제든 산뜻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거다.
나는 내가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존감이 어느 임계치를 지나면 획득이 되거나 그 이후에 자연스레 유지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발전이 아니라 발견을 한 거다. 자존감을 어렴풋이 알게 된 거고, 도구로 쓸 수 있게 된 거다.
신기한 게 며칠 전부터 아이유의 팔레트를 엄청 많이 듣고 있다. 사실 이 노래가 한참 유행할 당시에는 큰 관심이 없었어서 한 번도 내 의지로 튼 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계속 돌려 듣게 됐고, 오늘 아침에도 내내 들었다. 가사 한 줄 한 줄을 속으로 따라 부르면서 외우다시피 하고 나니, 이젠 노래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실제 아이유가 어떤 마음으로 만들어 부른 것인지는 미처 모르지만, 내게 이 노래는 어제오늘 자존감에 대한 깨달음을 상징하는 노래로 기억될 것 같다.
'그림보다 빼곡히 채운 팔레트'라는 가사가 있다. 자존감은 단일한 성취나 태도가 아니라, 필요하면 다시 시도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인 것 같다. 그리고 내 모든 경험과 가능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이 노래에서 느껴지는 묘한 초연함, 서글픔, 희망, 편안함도 다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한 순간 너무 예뻤던 내 모습이 박제된 채 나로 가득 찰 필요도 없고, 누가 날 미워한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혹은 나에게는 사랑받을 수도 있는 그런 나를 그냥 받아들이는 거다. 그게 다 나니까. 언제든 그 모든 것을 아우른 나라는 중심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