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새해 맞이
새해가 왔다. 해가 넘어가는 그 시간에 나는 롯데타워 앞에서 카운트다운과 불꽃놀이를 봤다. 그시간 거기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사는 게 나지만, 누가 끌고 가줘서 올해는 난생 처음 그런 걸 봤다. 생각보다 좋았다. 불꽃놀이 그 자체의 감흥은 아니고, 겨우 그걸 보려고 이 추위를 한 시간씩 견디며 밖에 오종종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좋았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대하는 태도, 뭐 그런 게 좋았다. 그래서 같이 서 있으면 그게 나한테 조금 옮아오기라도 할 것 같아서, 나는 그게 설레고 좋았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데 섞여 맞이한 2026년은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 궁금함도 일말의 사랑쯤은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볼 생각은 없다. 집 가는 심야버스에서 압사 직전의 공포를 느꼈다. 역시 송충이는 솔잎 먹고 살아야 한다.
오늘은 카페 가서 새 다이어리를 썼다. 불렛저널이라기엔 인덱스가 없고 그냥 내 맘대로 쓰는 모눈다이어리다. 새해가 왔다고 섣불리 계획을 거창히 세우지 않은 까닭은, 그동안 너무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강제로 겸손해지게 된다. 정말로 내가 지킬 수 있는 게 뭔지, 뭘 최소한이라도 지켜야 내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고 느낀 건 내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두 가지 있다는 거다. 나는 ADHD 환자고, C-PTSD 생존자다. 이 둘은 증상 면에서는 상당히 겹치지만 나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이니까 동시에 붙들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나는, 처참한 실행기능을 가진 동시에 때때로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나를 존중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법을 아직 배워나가는 중인, 그런 사람이다. 비효율적 완벽주의에 빠져 허황된 목표를 세우다가 시작도 제대로 못하기 일쑤고, 그럴 때마다 다 갈아엎고 "다시 시작하자!" 라고 외치지만, 정작 수없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마치 학습능력이라는 게 없는 듯이. 2025년에(이게 작년이라니 갑자기 소름) '새로 태어나겠다'면서 새로 산 다이어리만 대체 몇 권인지를 모르겠다. 세어보는 게 두렵다. 이게 회피라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게 덜 아프니까...
아무튼 새해가 되면 으레 사람들이 하는 다짐처럼, 나도 '조금은' 달라지고 싶었다. 우선 다이어리 첫 두 페이지에 '2026'을 크게 적고, 내가 세운 한 해 목표와 규칙들을 적었다. 언제든 다시 들춰볼 수 있게. 그리고 분기별 목표를 적는 페이지를 만들고, 그 뒤에는 매 달마다 내가 '사랑한 것들'을 기록하는 페이지를 마련했다. 예를 들면 1월에 내가 유난히 좋아한 노래, 음식, 장소, 영화, 글귀, 사람, 향기, 뭐 그런 것들. 해가 끝나고 다시 보면 이 한 해에 내가 마음 둔 것들이 이다지도 많았다는 사실이 나를 넘치게 위로해줄 것 같았다.
분기별 계획은 일단 페이지는 만들어놨으면서도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좀 고민했는데, 일단 분기별 테마를 정하고 1분기만 지금 구체적으로 쓰고 2분기부터는 시작 직전에 상황 봐서 다시 적기로 했다. 그렇게 완성한 1분기 계획은 다음과 같다.
"크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
- 삶의 바닥선 높이기
- 흔들려도 (너무 늦지 않게) 되돌아오는 사람 되기
1. 일어나면 바로 이부자리 정리
- (이불) 더러워도 괜찮음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음
- 그냥 들었다 펼치기라도 하기
- 다시 누워도 괜찮음
2. 조금이라도 바로 치우는 습관
- 들고 있는 물건/쓰레기 바닥에 버리지만 않아도 성공
- 쓰레기 하나라도 쓰레기통에 버리고 물건 제자리에 하나만 둬도 성공
- 하루 딱 한 개라도
3. 배달음식 대신 직접 요리
- 라면도 엄연히 요리(설거지 나오면 요리)
- 배민 재가입X(차라리 요기요나 쿠팡이츠)
- 나를 제대로 '대접'하기
4. 이 다이어리 계속 쓰기
- 틀리면 직직 긋고 그냥 쓰기 (수정테잎X)
- '자' 사용 금지
- 글씨 예쁘게 쓰기 금지
- 안 써도 펼치기라도 하기
- 갈아타기, 새 거 사기 금지
5. 약 잘 챙겨먹고 병원 잘 다니기
- (지금 다니는 병원 이름)로 계속 다니기(정착)
- 주말에도 아침약 꼭 먹기
- 자기 전 약도 챙겨먹는 습관 만들기
6. 주 1회 이상 헬스장
- PT 지각X 노쇼X
- PT 1회, 개인운동 1회
- (다니는 헬스장 어플 이름) 앱 복습
서른 줄에 들어서서 이런 개초딩같은 새해계획을 세우고 앉았는 게 조금 슬픈 건 사실이지만.. 이미 이렇게 살아와서 여기까지 와버린 걸 내가 더 어찌할 수가 없다. 그냥 담담히 복구하고 뒤쳐진 채로 나아가는 수밖에... 아무튼 이 계획의 핵심은 내가 2026 한해동안 끝까지 가지고 갈 6가지 습관을 좀 더 지속가능하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하는 시늉만 하더라도 결코 아예 내팽개칠 수는 없게 허들을 아주 낮춰놨다. 그리고 도중 실패하고 한동안 되는대로 살다가도 큰 죄책감 없이 바로 그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했다. 실제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이보다 좀더 거창한 게 맞지만, 그걸 이루기 위해선 이 여섯 가지 규칙이 제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이 이상의 것들은 아예 쓰지도 않았다. 나처럼 계획을 수없이 세웠지만 딱 그만의 실패와 좌절을 맛봐서, 이젠 계획 세우는 것조차 실패의 구렁텅이로 제발로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ADHD인들이 있다면.. 계획 달성의 조건을 '아주 과감히' 낮추는 걸 추천하고 싶다. (이런 말은 정말 연말까지 잘 지키고 나서 그때 해도 늦지 않겠으나, 나는 성급한 사람이므로 그냥 미리 했다.)
또 하나 포인트는 1분기 끝나고 지나간 1-3월을 회고하면서 필연적으로 자책에 빠지고 말 나를 위한 보호장치인데, 이 계획들을 못 지켰어도 단지 이 1분기 계획 페이지를 '10번 이상 읽어보기'라도 하면, 1분기 계획 어느정도 성공한 셈 치기로 했다. 벌써 오늘 1번 읽어서 형광펜 한 칸 칠했다. 유치하지만 나름 의도가 있다. 나는 나 스스로와 한 약속에조차 지독한 청개구리 기질을 발휘하는 인간이기에, "열심히 지키자!"라고 하는 것보다, "안 해도 되니까 그냥 읽어만 봐!"라고 해야 오히려 실천한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안다.
26.01.04.일
나는 지금 XXX공원 스타벅스에서 (철지난 발라드) 들으면서 이걸 쓰고 있어. 닫는 편지를 쓸 때 나는 어느 공간에 있을지 궁금하다.
(다니던 회사 이름)을 떠나게 됐어. 지금은 XXXXX에 지원할 생각이야. 느낌이 좋아.
내 1년이 어떻게 흘러갈지 걱정도 되지만 설레기도 해. 어쩐지 이보다 바닥은 없을 것 같거든. 나는 그래도 나를 제법 알게 된 것 같거든.
난 올해 나를 조금만 덜 미워하고 싶어. 혹은 '나를 존중하는 나'의 비중과 힘을 키우고 싶어. 나는 나를 미워도 하고 사랑도 하는데, 되도록 덜미워하고 더 사랑해주면 좋겠거든. 내가 내 편이면 좋겠어. 내가 나를 안 떠나고 안 버리면 좋겠어. 조금 더 관대하면 좋겠고, 나 자신에게 덜 가혹하면 좋겠어. 좀더 무모하고 오만하면 좋겠어. 나를 아끼고 잘 대접해주면 좋겠어.
오늘 아침에 햇반을 먹었는데 새로 산 예쁜 접시에 옮겨 담아서 먹었어. 그런 내 모습이 낯설지만 너무 맘에 들어서 내가 계속 쭉 그랬으면 좋겠어.
한 해의 시작을 맞은 XX야. 너무 겁내지마. 돌아갈 사람이, 집이, 장소가 없어도, 너는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면 돼. 언제든지 내게 돌아오면 돼.
네가 돌아오면 나는 너를 절대 그냥 두지 않아. 나는 네가 맞고 밟히고 버려지지 않아도 되는 존재인 걸 알아. 그리고 나라면 너를 절대 그렇게는 대하지 않을 거야.
마침내 살아남은 모든 날들을 축하해. 그 모든 밤들을 지나 너는 기어이 그래도 살아있는 게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됐네. 평생 아물지 않을 상처들을 알면서도, 때론 아직도 진물이 나는 걸 보면서도, 철부지처럼 그래도 살아있어서 좋은, 조금은 가벼워진 사람이 됐어.
다시 또 수없이 무너질지언정 아주 무너져 스러지지는 말길. 얄궂은 삶의 아이러니들이 네게 조금만 관대하길. 무참히 외로운 한밤 가운데서도 놓치고 있던 한줌 햇빛을 발견하는 사람이기를. 무거운 고민에 질식해가다가도 친구가 건넨 실없는 농담에 사르르 녹을 줄 아는 사람이기를.
이제 너는 살고 싶은 삶을 살아. 되고 싶은 너로 살아.
되어야 하는 나, 허락된 삶, 그런 건 없어. 애초부터 없었어.
머지않아 또 흔들릴 때에 이 글을 읽어. 부정하고 찢어버리고 싶어도 그냥 한번은 읽어.
나는 그거면 돼. 나는 네가 또 무너져도 또 용서할 거야.
네가 끝내 가슴 벅차게 행복해지지 않아도, 그래도 용서해.
아무래도 괜찮아. 나는 정말로 너를 버리지 않아.
연초에 쓴 편지를 '여는 편지'로, 연말에 쓸 편지를 '닫는 편지'로 이름붙이고 오늘 여는 편지를 썼다. 내가 나에게 이렇게 친절한 말을 해줄 줄은 쓰기 전까지 미처 몰랐는데, 그냥 손 가는대로 쓰다보니 써졌다. 달갑고 충만한 기분이다. 내가 나한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곧 과거가 되더라도 명백히 존재한다는 그 사실이 벅차고 좋다.
그리하여 나는 정말 새해를 맞았다. 얼마 전까지는 시간에 질질 끌려 다니는 삶인 것만 같아서, 새해가 오는 것도 불쾌하고 두려웠다. 또 새해에도 질질 끌려다닐 것만 같아서. 그런데 오늘에야 나는 정말로 새해를 맞은 기분이다. 이제 시간과 발맞춰 가는 것 같다. 이 느낌이 오래 가지 않아도, 그래도 괜찮다. 나는 돌아오고 또 돌아올 것을 오늘 약속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