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마 Nov 30. 2023

서울대에 가고 보니 ADHD였다 (1)

ADHD 약 없이 서울대에 갈 수 있었던 이유

ADHD 고위험군입니다. 고기능 ADHD면 공부를 잘해도 ADHD일 수 있어요.



"제가 무슨 ADHD..."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의사가 틈 없는 부연설명을 했다. 그때 내게 ADHD의 이미지란, 교실을 마구 뛰어다니는 통제불능의 남자아이 정도였는데. 나는 누가 봐도 그런 이미지랑은 1광년쯤 멀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진단을 받게 된 최근 시점에서야 그랬지만, 사실은 한 3년 전쯤 다른 병원에 다닐 적에 내 입으로 직접 ADHD의 가능성을 제기했었다. 


"선생님, 혹시 제가 ADHD일 수도 있을까요? 기억력이 너무 나쁘고 집중이 안 돼요."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집중이 안 되세요?"

"음... 아뇨. 집에서 영화 볼 땐 집중할 수 있어요."

"그럼 ADHD는 아니에요."


산뜻하고 단호한 그 말에 나는 금세 내 의문을 지웠다. 늘 친절하고 따뜻한 선생님이셨기에 난 그분을 굉장히 신뢰하고 있었다. TV에서 잠깐 ADHD에 관해 보고는 의외로 나랑 거리가 먼 병이 아니구나 싶어 말씀드렸는데, 아무렴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고 하시니 아니겠지 싶었다. 내 머릿속에서 ADHD는 다시 교실을 뛰어다니는 남자아이의 이미지로 축소되었고, 그마저 잊혀졌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내가 진짜 ADHD라고? 그걸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니. 머릿속이 삽시간에 혼란해졌다. '그땐 아니랬는데, 지금은 또 ADHD? 그럼 내 3년은 뭐가 되는 거지?'


ADHD약과 조울증약의 기전이 정반대라는 의사의 말은 나를 더욱 당혹게 했다. 나는 그동안 조울증, 양극성장애 2형으로 진단되어 무려 4년간 약물치료 중이었다. 진단을 늦게 받은 것도 모자라서, 내게 더 해로운 약을 꼬박꼬박 먹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받아들이기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셨으면 좋겠어요."


의사가 위로차 내게 건넨 말은 참 시의적절하고, 합리적이고, 따듯했다. 잠시나마 내 맘은 중심을 찾았다. 그러고 나서 진료실을 빠져나오고는 집 가는 버스를 잘못 탔다. 진정되고 싶었으나 진정되지 않았다.






약 3년 전 내 입으로 가능성을 제기하고도 금세 지울 수 있었던 이유. 진단을 받고도 바로 납득할 수가 없는 이유. 그 이유는 2가지다.


1. 나는 서울대에 갔다.

2. 성인기 전후로 내 기능 수준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저급하되 가장 효율적인 표현을 쓰자면, 서울대에 가자마자 좆망했기 때문이다. 


ADHD약 없이 서울대에 갔다. 심지어 사교육 문턱도 못 밟아봤다. 당시 강남구청 인강 1년 회비가 3만 원인가 그랬는데, 우리 집 가정형편은 그조차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오로지 학교 수업과 책으로만 공부했다. 가난하더라도 교육에 열성적인 부모님 아래 자란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중학교를 중퇴했다. 나는 원서철에 문과 이과 개념이 없는 엄마에게 속성으로 설명을 마친 뒤 여기저기를 무슨 무슨 전형으로 지원하겠노라고 통보했다. 


그러니 나는 제법 열악한 환경에서 성과를 거둔 사람이었다. 그땐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무뚝뚝한 담임선생님이 대견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네가 서울대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니." 그래서 나는 내가 대학에 가서도 지금껏 그래왔듯 열심히 할 줄 알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구태여 하지도 않았다. '내일은 해가 뜰 것이다'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당연해서 의식조차 되지 않았다.


가능하면 이 갑작스럽고 다소 기이한 좆망의 역사를 구구절절 생생히 쓰고 싶으나, 내 일인데도 기억이 그리 선명하고 구체적이지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서울대 합격을 확인한 바로 그 순간 기절하듯 잠들어 눈 떠보니 지금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내 이십 대의 대부분이 통으로 날아간 것 같은 기분. 


길고 긴 번아웃이었나 보다...라고 생각하기에는 내 양심 삼각형이 아직 날카롭다. 아주 최근에야 어느 정도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고 정리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라고 쓰려고 했으나 사실 그것도 아직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쓴다는 건 섣부른 실수다. 그냥 약속 나가기 전까지 20분이 남아서 시간 때울 겸 씨부린다고 하는 게 제일 정확할 것 같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건, 겉으로는 모범생의 전형이었던 내가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른 최상위권 애들과는 좀 달랐다는 사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콘서타의 부작용은 현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