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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면 춥고 끄면 덥다.

어떤 것이 남긴 자리나 표시

by 김시월

자취를 시작하면서 여기만큼은 돈을 쓰지 말아야지 다짐한 것들이 있다. 아예 돈을 쓰지 않겠다는 건 유일하게 에어컨이었다. 더위를 안 타는 나와, 선풍기가 있고, 좋은 건 아니지만 겨울에도 창문으로 바람이 잘 들어오는 걸로 봐선 여름에 분명히 시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1년밖에 지내지 않을 곳인데 두세 달만 버티면 괜찮지 않을까?


괜찮지 않았다. 그냥 남들처럼 4월, 5월에 일찍 에어컨 청소 예약을 잡을 걸 그랬다. 갑자기 너무 더워지는 탓에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은 필수였고 선풍기는 내가 집에 있는 내내 시원하지도 않은 미지근한 바람을 보내주었다. 더운 바람을 쐬고 있자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땀이 조금이라도 흐른다 싶으면 샤워를 했고, 샤워한 뒤에 잠깐은 시원했지만 곧 그 전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에어컨 청소 예약을 잡는 건 거의 전쟁이었다. 일반 직장인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잡을 수 있었을까? 청소 업체도 겨우 골랐는데, 일정이 맞지 않으면 다른 업체를 또 알아봐야 했다. 그렇다고 아무 업체에나 맡기고 싶지 않았다. 나의 결심을 무너뜨리고 예약을 잡는 건데, 대충 하는 곳이면 안 되니까.


당근마켓과 네이버, 지역 커뮤니티의 도움을 받아 업체를 세 군데로 추렸고, 일정을 최대한 맞춰봤다. 주말이 되는 곳도 있었지만 왜 그 주에 하필 중요한 일정이 있는 걸까. 나는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을 쐴 수 없는 자취생인 걸까? 일주일을 더 미지근한 선풍기 바람으로 버텨야 하는 걸까 눈앞이 흐려질 때쯤, 겨우 일정을 맞출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일정이 하나 취소됐기 때문이다.


비교적 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프리랜서인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지만, 이번에 조금 작아졌다. 에어컨 청소 일정 하나 맞추지 못하는 프리랜서란...


2주 동안의 전쟁 끝에 오늘은 시원한 바람을 쐬고 나왔다. 역시 사람은 필요한 곳에 투자를 해야 한다. 두 세 달? 그까짓 거 버텨보지, 뭐. 라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잘 몰랐다. 자취는 처음이니까. 모든 게 다 알아서 흘러갔던 본가에서와는 다르다. 어린 나이도 아닌데, 알아가야 하는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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