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의 낮은 조용했다. 관람객 몇 명과 티켓 발권하는 직원 한 명. 그리고 나. 덕분에 서울에 있는 궁과는 다르게 여유있고 하나하나 곱씹어보면서 구경할 수 있었다. 원하는 각도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장소마다 비치된 안내문을 누군가 가릴까봐 가까이 가지 않고도 한 번에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여유가 있었다, 이 화성행궁은.
그렇다고 인기가 적진 않았다. 확실히 야간개장이 인기가 있는지, 야간개장 시간에는 관람객이 많았다. 커플, 가족단위가 굉장히 많았다. 아마 퇴근하고 오는 거라고 예상한다. 퇴근 직후 데이트하기에 알맞은 공간이다. 나름 으슥한 곳도 있고 (왜 있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지만) 포토존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게 다 인증샷 때문이다. 궁 한가운데 말이야. (꼰대)
풍수지리 때문일까. 화성행궁 뒤에는 큰 산이 있다. 화성행궁의 뒷배경, 마치 집을 지켜주는 담벼락처럼 높고 웅장하게 산이 있다. 그런데 그 산과 화성행궁을 지키는 문은 정말 작았다. 열 명도 아니지, 다섯 명만 그 문을 놓고 싸워도 이기고 들어올 것 같았다. 물론 싸우면 나라 대 나라의 싸움이 되는 거겠지만, 생각보다 허술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왕이 일상생활을 하는 곳도 아니고 잠깐 오갈 때 들리는 곳이니 괜찮지 않았을까.
장소마다 드나드는 문의 높이가 낮았다. 평균보다 살짝 큰 키였지만, 아마 평균 키가 들어가도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주로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긴 하지만 왕이나 그 주변인들도 드나들지 않았을까. 왕이 고개를 숙여도 되나? 안 될 건 없겠지.
낮과 밤을 선택해보라는 기회가 생긴다면 밤을 선택하겠다. 궁뿐만이 아니어도 밤은 위험하다. 사람에게 근거없는 자신감이 생기고,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준다. 그리고 화성행궁과 밤이 정말 잘 어울린다. 지금은 조명이 있어서 더 그럴 수 있겠지만. 그때는 불을 이용했으니까 느낌은 비슷하지 않을까?
궁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결국 과거라서 그럴까? 괜히 어둡고 슬픈 기운이 있다. 낮에도, 밤에도. 난 조상들 덕분에 지금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놀 수 있는데, 그들은 사라졌다. 나도 누군가의 조상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누군가를 이어온 사람이니까. 사람은 왜 죽어야 할까. 살 수 있는 나이가 늘어가고는 있지만 백세시대로는 부족하다. 그냥 안 죽고 다 살면 좋겠다. 먼저 떠나면 슬프니까.
가끔 내가 과거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억을 잃고 지금의 세대로 환생한 거라면. 그리고 어느 날 사고를 당해서 옛기억이 떠오른다면. 만약 그런 사람이 미래에 태어나서 기억을 떠올렸다면, 마침 타임머신이 개발됐다면, 그 사람은 과거로 돌아갈까? 아니면 최첨단 시대에 계속 살아갈까? 난 돌아갈 것이다. 지금의 가족도 있지만, 그때의 나를 마무리하고 싶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런 궁에서 지내보고 싶다. 정말 불편하겠지만 감수하고도 1박은 괜찮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그럴 일이 절대 없으니까 한옥을 지어서 꿈을 실현해봐야겠다. 얼마 전 다녀온 오죽헌이 더 좋을 것 같다. 오죽헌의 분위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어떻게 보면 우아한데, 어떻게 보면 단촐해서 조금 슬픈 느낌.
우리나라에 있는 이런 궁들을 다 다녀봐야 하는데. 역시 백세로는 모자라다. 50년만 더 주시고, 건강은 지금처럼 유지해주시고. 150살 살면 내가 딱 만족하고 알아서 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