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크림과의 전쟁
휴양지와 도시 중 어디로 여행을 가고 싶냐 하면 열 번 중 열 번은 도시를 선택했다. 휴양지보다 도시를 여행하는 게 더 큰 매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특히 뉴욕 같은 대도시는 나의 심장박동을 두 배로 뛰게 해주는 대표적인 여행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말 그대로 휴식이 필요했다. 호캉스도 즐기지 않는 나에게, 처음으로 휴식이 메인이 되는 여행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휴양지라 하면 날씨가 좋고, 짧고 얇은 옷을 입고 다니며, 뜨거운 해를 피해 물속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닌가. 아주 오래전 코타키나발루에 다녀왔던 그 기억을 잊어버린 나는, 발리를 얕잡아보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상관없이 바르는 게 선크림이었고 유독 잘 타버리는 손등에도 바르는 게 선크림이었다. 혹시 몰라서 뜯은 지 얼마 안 된 선크림, 그리고 세일기간에 새로 산 선크림까지 총 두 개의 선크림을 챙겼다. 스프레이형 선크림도 사갈까 하다가, ‘설마’하는 마음에 그냥 갔는데.. 역시 머리에 떠오를 때 챙겨야 하는 게 진리인 것을.. 난 몰랐다. 발리 웅우라이 공항에 도착했을 땐 저녁이었고, 공항에서 택시로 이동하는 시간 말고는 덥지 않아서 그렇게 더운 줄도 몰랐다. 사실, 알아챌 기회는 많았다. 그런데 난 기회를 다 놓쳐버린 거지.
선크림의 중요성을 안 건 셋째 날이었다. 둘째 날에 입었던 옷이 원인이었다. 여행 온 김에, 우리나라에서는 입기 어려운 옷을 입은 것이었다. 어깨가 훤히 보이는 민소매였고, 다행히 바지는 긴바지였다. 그렇게 살을 드러낼 거면, 선크림을 구석구석 발랐어야 했는데 얼굴에만 바른 것이었다. 다음날 일어나니 옷 모양 그대로 타있었고, 얼마나 뜨거웠는지 벌겋게 타있었다. 급하게 알로에를 사서 어깨와 등에 발라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단 하루정도 선크림을 잔뜩 발라놓고 지켜보자, 했는데 문제는 다음날까지 기다리기가 어려웠다. 옷을 입기 위해 조금만 스쳐도 따가웠다. 맨몸에도 따가운데, 샤워할 때는 아주 그냥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며칠이 지나니 탄 부분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때가 나오는 줄 알고 놀랐는데, 탄 부분이 벗겨지는 것이라고 했다. 벗겨지는 게 좋은 건지… 여튼 외국에서 이런 꼴로 돌아다닐 수 없어서 (물론 더 타기도 싫어서) 온몸을 감싸는 옷을 입고 다녔다. 여행할 생각에 들뜨기만 했지, 이런 준비도 하지 않다니.
살이 벗겨지기 시작하면서 선크림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최대한 살이 보이지 않는 옷을 입기도 했지만, 애초에 어떤 옷을 입든 온몸에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라줬다. 얼굴만 발라서 천천히 줄어들던 선크림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얼굴을 바르고 나면 팔에 길게 뿌려주고, 손등, 어깨, 목까지 구석구석 발랐다. 선크림을 그렇게 열심히 발라준 것도 오랜만이었다. 아니. 처음일 수도? 그런데, 인생은 정말 쉽지 않다는 걸 느꼈다. 난 하필 그 시기에 수영을 배워버린 것이다.
물을 좋아하는 것과 동시에 무서워하던 내가, 두 번째 숙소에 있던 수영장에서 첫 수영을 성공했다. 큰맘 먹고 휴양지까지 왔는데 수영을 안 한다? 그것만큼 아쉬운 일이 없을 것이다. 마음은 급하지만 몸은 천천히 수영을 배웠고, 얼마 후 도움 없이 혼자 헤엄을 칠 수 있게 됐다. 그 이후로 매일 같이 수영장에 들어갔더니, 하루에 두 번을 들어가는 날도 있었다. 고로, 선크림을 바르는 횟수가 두 배가 되어버린 것이다. 대충 패턴은 이렇다. 전날 샤워 후 -> 다음 날 아침에 모닝 수영 -> 샤워 후 선크림을 바르고 -> 외출했다가 숙소에 돌아와서 샤워 후 선크림 -> 저녁 수영 -> 마지막 샤워. 선크림과의 전쟁이기도 하고, 샤워 전쟁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물이 잘 맞았다는 것이다. 발리 여행 카페에 들어가 보면 물이 안 맞아서 불편하다는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샤워기 필터를 가져가고, 양치하면서 입을 헹굴 때 생수로 한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난 세수도 그냥 틀어서 했고, 양치도 생수를 안 썼다. 가뜩이나 선크림을 바르느라 고생했는데 샤워할 때마다 물 때문에 고생했다면 그건 휴양지가 아니라 전쟁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선크림과의 전쟁에서 내가 이겼을까? 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발등은 신발 모양대로 타서 아직까지 안 돌아왔고, 손등에도 전에 볼 수 없었던 많은 기미들이 올라왔고, 등은 아직 민소매 모양대로 타있다. 붉어진 살이 돌아오긴 했지만, 이정도면 나는 완벽하게 졌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도 발리를 갈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가게 된다면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부터 선크림을 잔뜩 바르고, 잠깐이라도 밖에 나간다 하면 온몸에 선크림을 바를 예정이다. 썬 스프레이도 필수겠지?